야수파 미술은 색채를 해방한 시각언어였다
정광균의 80일간 유럽미술관 산책
모더니즘의 폭발, 색을 통한 감각의 해방 (14)
필자는 ‘나 홀로 자유여행’으로 버킷리스트 중 하나였던 ‘80일간의 유럽미술 여행’을 다녀왔다. 유럽 12개국의 주요 미술관 순례 경험을 바탕으로 ‘르네상스 이후의 고전, 모던 미술과 명작이야기’를 재조명해본다. 지금까지는 신 중심의 중세미술에서 인간중심의 미술로 전환된 15~16세기의 르네상스, 매너리즘 미술, 종교개혁과 대서양 시대의 도래로 교황, 국왕, 귀족, 시민 계급 중심의 미술로 전환된 17~18세기의 바로크, 로코코 미술, 프랑스대혁명, 산업혁명의 영향으로 근대사회로 전환된 18~19세기의 신고전주의, 낭만주의, 사실주의 미술, 19세기 후반~20세기 초의 인상주의, 후기 인상주의 미술을 살펴보았다. 미술은 역사와 현실을 반영하는 ‘시대의 거울’이다. 그러나 19세기 후반의 근대사회는 산업혁명의 심화, 과학기술의 발전, 제국주의의 확대 등으로 정신적 위기를 맞이하면서 미술은 ‘시대의 실험’이 된다. 이에 따라 르네상스 이후 약 500년간 지속된 ‘고전미술’은 균열, 해체, 붕괴로 이어지고, 모더니즘이 등장하게 된다. 미술의 ‘패러다임’이 바뀌게 된 것이다. 모더니즘의 서곡이었던 인상주의를 비판적으로 계승한 후기 인상주의는 모더니즘의 서막이었다. 이제 20세기 초반의 야수파, 입체파 미술이 ‘색채와 형태의 해방’을 추구하면서 모더니즘 미술은 본격적으로 폭발하게 된다.
야수파(Fauvism)는 후기 인상주의 미술에 이어 20세기 초반에 프랑스를 중심으로 나타난 미술 사조다. 불어로 ‘야수 들(Fauves)’이라는 조롱조 별명에 ‘사조(~ism, 주의)’가 붙은 것이다. 그런데 왜 야수주의가 아니고 야수파인가? 라는 의문이 든다. 이는 포비즘을 일본이 야수파로 번역한 것을 우리가 그대로 받아들인 데서 기인한다. 논란의 여지가 있는 명칭이다. 인상주의를 인상파로 번역해서 쓰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야수파의 ‘파(派)’도 르네상스 시대의 피렌체파, 베네치아파 같은 ‘유파(School)’와는 다른 개념이라 혼동을 준다. 그들은 공식적으로 유파를 결성하지도 않았으며 자신들이 그러한 그림을 추구한다고 공식 선언한 바도 없다.
그렇기에 야수파의 생명력은 길지 않았다. 그러나 미술사 속 야수파의 파괴력은 지각변동 수준이었다. ‘코페르니쿠스’적 혁신을 실험한 후기 인상주의 미술에서 더 나아가 미술의 기본인 형(형태)과 색(색채)에서 ‘색을 해방’한 미술이었기 때문이다. 야수파를 주도한 마티스, 드랭, 블라맹크 등은 고흐의 강렬한 색채, 고갱의 단순화된 색 면, 세잔의 구조를 계승하고 확장하였다. 특히 고흐의 격정적인 색채와 고갱의 원시적 색감은 그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그들에게 바다는 푸른색, 나무와 산은 초록색, 대지는 갈색이 아니었다. 화가 자신이 느끼는 대로 주관적으로 색을 쓴 것이었다. 그렇기에 ‘추한 그림’이나 ‘미치광이들의 반란’으로 비난받았다. 야수파는 색을 대담하고, 파괴적으로 씀으로써 ‘색채를 해방’하고, ‘감각을 해방’한 시각언어였다. 그러나 ‘색채를 해방’한 야수파는 ‘형태를 해체’한 입체파와 함께 모더니즘을 본격적으로 폭발시킨 혁신적인 사조였다.
야수파 미술의 핵심 키워드는 본능, 감정, 해방으로 모더니즘의 정신
야수파는 대략 1904년에서 1910년에 걸쳐 활동하였다. 그러나 공식적인 활동은 1905년 살롱도톤(가을 살롱) 전시에 마티스, 드랭, 블라맹크 등이 참여하면서부터다. ‘봄 살롱’이 주류인 아카데미즘 미술의 등용문이라면 1903년에 창설된 ‘가을 살롱’은 대안 전시회로 비주류의 등용문이었다. 즉, 인상주의 이후 등장한 젊은 예술가들의 ‘해방구’이면서 혁신적인 예술을 선보일 수 있는 ‘실험의 장’이었던 것이다. 충격적인 색채로 1905년의 가을 살롱에 등장한 마티스, 드랭, 블라맹크의 그림은 조롱거리였다. 비평가 루이 보셀이 ‘야수들’이라고 비꼰 것이 야수파의 유래가 된 것이다. 그러나 1907년 세잔의 회고전으로 입체파가 부상하면서 야수파는 사실상 해체되었다. 그들은 모두 아카데미 주류 회화에 일격을 가한다는 패기와 야심은 강했으나, 공동의 이념이나 결속력은 약했기에 각자의 길을 가게 된 것이다.
벨에포크(Belle Époque, 아름다운 시대) 말기는 파리의 최고 번영기이면서 도덕적 회의, 불안, 정신적 위기가 공존했던 시기였다. 야수파는 번영과 화려함 이면에 도사린 억압과 불안을 감각의 색채로 분출한 것이었다. 본능, 감정, 해방은 이 시기 예술의 핵심 키워드였고 모더니즘의 정신이기도 했다. 마티스는 1905년 자신의 아내 아멜리를 모델로 그린 ‘모자를 쓴 여인’을 가을 살롱에 출품했다. “아이들이 크레용으로 장난친 것 같다”, “얼굴(초록, 파랑, 분홍색)이 폭탄을 맞은 것 같다”라는 혹평에 마티스는 “나는 여자를 그린 것이 아니라 그림을 그린 것이다”라고 응수했다. 과연 야수파 거장다운 명언이다. 야수파는 ‘재현’이 아니라 비현실적인 색채, 거친 붓질, 주관적인 감정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이는 바로 야수파 미술의 특징이며 감상 포인트가 된다.
퐁피두 미술관은 야수파를 20세기 혁신적 회화의 기점으로 조명
필자는 지난해 6월 11일부터 21일간 파리의 오르세, 퐁피두 센터, 트루아의 현대미술관, 6월 27일은 니스의 마티스 미술관, 8월 18일부터 21일간은 런던의 테이트 브리튼, 모던 미술관 등을 방문하면서 야수파 미술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았다. 야수파의 수명은 짧았지만 그들의 미술은 원색만큼 강렬했다. 짧았기에 작품 수는 적었고 아쉽게도 마티스의 대표적인 명작들은 의뢰인, 아들, 화상에 의해 러시아, 미국, 스위스, 독일 등에 흩어져 있었다. 오르세미술관은 인상주의, 후기 인상주의가 중심이고 야수파 작품은 야수파 전후의 연결 고리로서 맛보기식이라 다소 싱거웠다. 반면에 ‘퐁피두 센터’는 야수파, 입체파, 표현주의 미술을 20세기 혁신적 회화의 출발점으로 조명하고 있었다. 이는 1977년 개관 당시 퐁피두가 마티스와 피카소 작품 등을 기점으로 삼아 ‘국립현대미술관’으로 출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티스가 오래 살아서인지 (85세 사망) 화풍이 변한 후기작품과 입체파 미술이 중심이었다.
야수파 미술은 영국, 독일 등에도 영향을 미쳤으나 그들 나라에서는 과도적 미술로서 존재감은 미미했다. 마티스가 병상에서 색종이 오리기 등 콜라주 작업을 하면서 말년(약 10년)을 보냈던 니스 언덕 위의 ‘마티스 미술관’은 보수 중이라 아쉽게도 그의 창작공간을 볼 수 없었다. 유럽의 지역미술관은 비수기에 보수를 많이 해서 사전에 개관 여부를 반드시 확인할 필요가 있다. 여행은 운도 따르지만 야수파는 마치 20세기 격변기에 출몰했다 사라진 게릴라처럼 발자취를 추적하기가 쉽지 않았다. 남프랑스의 작열하는 태양은 마티스에게 감각과 색채의 해방에 영감을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후끈후끈 찌는 날씨에 발길을 돌리는 필자에게 쏟아지는 태양 덩어리는 가혹했다. 더위에 지쳐서인지 프랑스 소설가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에서 주인공 뫼르소가 법정에서 “태양이 눈 부셔서 쏘았다”라고 한 말이 저절로 떠올랐다.
마티스의 붉은 방과 춤은 ‘감정의 색’으로 추상회화의 문을 연 걸작
이제 야수파 대가들의 작품을 살펴본다. 앙리 마티스(1869~1954)는 야수파의 창시자며 파블로 피카소와 함께 ‘20세기 최고의 화가’로 꼽히는 거장이다. 피카소가 “마티스의 뱃속에는 태양이 들어있다”라고 말했을 정도로 그는 탁월한 ‘색채 마술사’였다. 프랑스 북부의 한 지방 도시에서 태어나 법률가를 꿈꾸었던 마티스는 병원에서 맹장염 수술 후 회복 중일 때 어머니가 사준 물감과 캔버스가 동기가 되어 화가가 될 것을 결심했다. 이듬해인 22살 때 파리로 나가 그림을 배우면서 에콜데 보자르(국립미술학교)를 졸업 후 화가의 길로 들어섰다. 초기에는 고전주의, 인상주의 그림을 그렸으나 1905년 가을 살롱에 ‘모자를 쓴 여인(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 소장)’을 출품하면서 ‘인상, 해돋이’를 그린 인상주의의 모네처럼 갑자기 유명해졌다.
마티스의 명작들은 앞서 언급한 대로 대부분 프랑스 밖에 있다. ‘삶의 기쁨(1905~6)’은 미국 필라델피아의 반스 재단, ‘푸른 누드(1952)’는 뉴욕의 현대미술관(MoMA), ‘붉은 방(1908)’과 ‘춤(1909~1910)’은 러시아 상트페테스부르크의 에르미타주 미술관에 있다. 필자는 러시아 방문도 사전에 계획하고 일단 출국했는데 서유럽발 항공편은 우크라이나 사태로 대부분 중단되었고 동유럽발 항공권은 너무 비싸 포기했다. 하지만 과거에 에르미타주 미술관을 방문한 적이 있기에 ‘붉은 방’과 ‘춤’을 소개한다. 이 두 그림은 러시아의 상류층 상인이었던 슈추킨이 마티스 그림을 좋아해서 의뢰하고 구매한 것인데 1917년 러시아 혁명 후 국유화되면서 에르미타주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다.
‘붉은 방’은 마티스의 대표작이면서 야수파의 대표작이다. 단순한 실내풍경이나 현실의 평화로운 일상을 비현실적인 색으로 그린 것이다(그림 1). 창밖 풍경도 실제의 자연이 아닌 마티스의 감각이 조율한 자연이다. 즉, ‘현실의 색’이 아닌 ‘감정의 색’이다. 원근법은 철저히 무시되었으며 탁자, 벽, 바닥, 창밖 풍경은 평면적이고 곡선의 무늬와 보색인 녹색과 붉은색이 지배적이라 장식 미가 있다. 마티스는 “그림은 안락의자처럼 편안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주관적인 색채를 통해 내면을 시각화한 그의 예술관이다.
다음은 역시 에르미타주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춤’(그림 2)이다. 다섯 명의 나체 인물이 손을 맞잡고 원형으로 춤추는 장면이다. 1909년에 소형 습작(뉴욕, MoMA 소장)을 제작 후 대작으로 제작한 그림이다. 해방된 몸의 에너지와 원초적 생명의 리듬이 묻어난다. 붉은 인간(생명의 힘), 초록 땅(자연), 파란 하늘(우주)의 3색은 단순하지만 화합과 조화를 상징한다. 이렇게 마티스는 벨에포크 시대의 잠재된 불안을 해방된 색채로 풀어낸 것이다. 모더니즘의 혁신적 실험이며 ‘감정의 색’으로 추상회화의 문을 연 걸작이다.
드랭의 빅벤은 주관적 감정에 따라 색채를 실험한 도시풍경화의 명작
앙드레 드랭(1880~1954)도 마티스와 의기투합해서 1905년의 가을 살롱에 참여한 야수파의 창시자다. 파리 근교인 샤투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엔지니어가 되려 하였으나 카리에르 아카데미에서 미술을 배운 후 1900년경 마티스와 교류하면서 화가의 길을 걸었다. 야수파가 해체된 이후에는 피카소, 브라크와도 교류하면서 입체파 그림도 실험하였으나 점차 색채보다는 형태의 안정성과 구성에 관심을 두고 고전주의 양식의 인물화, 정물화 등을 그렸다. 드랭은 가을 살롱에 참가하기 위해 남프랑스의 소위 ‘야수파 마을’로 불리는 콜리우르(Collioure)에서 마티스와 함께 색채실험을 하면서 그린 ‘콜리우르의 풍경(1905)’을 비롯하여 ‘채링크로스 다리’, ‘그린 하우스’ 등의 명작을 남겼다.
‘빅벤(1906)’은 트루아 현대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그의 대표작 중 하나다(그림 3). 드랭이 1905년 가을 살롱 이후 한 화상의 후원으로 영국 런던을 여행하면서 체류 호텔에서 템즈 강, 웨스트민스터 다리, 국회의사당을 바라보며 그린 그림이다. 원근법은 무시되었고 정확한 구조나 형태보다는 붉은 오렌지색, 초록색, 푸른 보라색 등의 비현실적인 색으로 감정을 표현하였다. 그림에서는 세잔의 구성, 쇠라의 점묘법, 고흐의 붓질, 고갱의 색상이 묻어난다. 현실 속 빅벤의 색상과 다르게 주관적 감정에 따라 색채를 실험한 도시풍경화의 명작이다.
블라맹크의 샤투의 다리는 색채와 감정을 극적으로 표현한 명작
모리스 드 블라맹크(1876~1958)는 드랭과의 교우로 마티스를 알게 되면서 1905년의 가을 살롱에 참여한 야수파다. 그는 파리 근교인 발두아즈의 음악가 집안(아버지는 바이올리니스트, 어머니는 피아니스트) 출신으로 젊은 시절에는 바이올린 연주나 자전거 선수로 활동하였으나 독학으로 그림을 배우면서 화가의 길을 걸었다. 한마디로 자수성가형 화가였다. 블라맹크는 특히, 고흐의 색감과 격렬한 붓 터치에 깊은 영향을 받았으며 1899년 드랭과의 만남은 그의 예술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 두 사람은 함께 스튜디오를 공유하면서 자연을 대상으로 그림을 그렸는데 블라맹크는 “화가는 무정부주의자와 같다”라고 말할 정도로 포브스(야수) 같은 화가였다. 자유로운 붓놀림과 원색으로 감정에 충실한 그림을 그린 것이다. 그러나 야수파가 해체된 이후에는 세잔의 영향을 받아 구조적인 회화로 방향을 전환했다. 주요 작품으로는 ‘센 강의 다리’, ‘강변 풍경’, ‘붉은 나무’ 등의 명작을 남겼다.
퐁피두 센터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샤투의 다리(1906)’는 그의 대표작 중 하나다(그림 4). 파리 근교 샤투 지역의 센 강 다리를 그린 것으로 야수파 적인 색채실험이 드러나는 작품이다. 하늘, 강, 다리, 나무를 원색으로 표현하면서 현실의 풍경을 화가의 주관적 감정과 에너지를 살려서 재구성한 것이다. 화면 전체는 자유롭고 두꺼운 붓질로 덮여 있으며 붉은 오렌지, 초록, 파랑, 노란색은 채색의 수단이 아닌 감정의 표현이다. 그림은 “나는 자연을 본대로가 아니라, 느낀 대로 그린다”라는 블라맹크의 말을 대변한다. 고흐의 영향을 받아 색채와 감정을 극적으로 표현한 그의 작품은 표현주의, 색면회화, 신표현주의 미술에 영향을 미쳤다.
야수파 미술은 색채의 자율성을 선언한 회화 혁명
이렇게 야수파 미술은 후기 인상주의의 혁신적인 실험 위에서 색채를 통해 본능, 감정, 감각을 해방한 시각언어였다. 강렬한 원색, 형태의 단순화, 자유분방한 붓 터치는 야수파의 상징이었고 모더니즘의 폭발이었다. ‘물꼬가 트이면 물이 흐르고’, ‘둑에 구멍이 나면 뚝 방이 터지는 법’이다. 이제 야수파 미술은 고전미술의 댐을 붕괴시키면서 회화의 흐름을 바꿔 놓게 된 것이다.
여기서 야수파 미술은 몇 가지 중요한 시사점을 남긴다. 첫째, 야수파 미술은 벨에포크 말기에 잠재된 도덕적 회의, 불안, 무의식, 본능의 표출이었다. 둘째, ‘색채의 해방’을 통해 예술가들의 내면을 시각적으로 전달하는 아방가르드 예술의 ‘해방구’였다. 셋째, 야수파 미술은 이후 현대미술의 흐름을 바꾸는 ‘색채혁명’의 기점이 되었다. 즉, 입체파, 표현주의, 추상미술, 색면회화에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이다.
그렇다. 인상주의가 회화의 보는 방식을 바꾼 ‘시각 혁명’으로 모더니즘의 서곡(Overture)이었다면 후기 인상주의는 인상주의를 비판적으로 계승한 ‘코페르니쿠스적 혁신’으로 모더니즘의 서막(Prologue) 이었으며 야수파는 색채의 해방을 선언한 ‘회화의 혁명’으로 모더니즘의 본 막(Main Act)이었다. 이제 1907년 세잔의 회고전을 계기로 색채 중심의 야수파는 퇴조하고 구조중심의 입체파에 자리를 내주면서 모더니즘은 더욱 발전하게 된다.
정광균 칼럼니스트는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제19회 외무고시에 합격하여 외교관의 길을 걸었다. 주토론토 총영사와 주이집트 대사를 역임하며 외교 현장에서 풍부한 경험을 쌓았다. 외교관 은퇴 후에는 학문의 길로 전환하여, 한양대학교 관광학과에서 DMZ 관광개발과 관광자원 분야를 연구하며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남서울대학교 관광경영학과 객원교수와 한양대학교 관광학과 및 국제관광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며 교육자로서도 활동했다. 현재는 추계예술대학교 대학원 문화예술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서양미술사 분야의 학위를 준비 중이다. 동시에 한국미술협회 산하 일원회와 현대사생회 회원으로 활동하며 화가로서도 활발히 작품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필자는 외교관으로서의 국제적 시각, 관광학 전문가로서의 학술적 접근, 현장 예술가로서의 실제적 안목, 서양 미술사 연구자로서의 전문성을 두루 갖추고 있다. 이러한 다면적인 배경을 바탕으로, 단순한 여행기나 미술사 해설을 넘어서는 심도 있는 연재를 선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