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러 정상회담 '기대반 불신반'
젤렌스키 “영토 양보 없다” 재확인 … 우크라 전선에서는 휴전 회의론 확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전쟁 종식 방안을 논의할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트럼프 대통령의 ‘영토 교환’ 발언이 논란에 불을 지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과 유럽 지도자들은 즉각 반발하며 영토 보전 원칙을 재차 강조하고 나섰다.
로이터, AFP, AP 등 복수의 외신에 따르면, 젤렌스키 대통령은 11일 엑스(X·옛 트위터)를 통해 “러시아는 지난 한 주 동안 활공폭탄 1000발 이상과 드론 1400대를 동원해 공격했으며 미사일 공습도 지속되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살인을 멈추지 않는 국가에 어떤 보상도 주어서는 안 된다”며 “이는 도덕적 판단이 아닌 합리적 결정”이라고 단언했다. 이어 “영토를 양보한다고 해서 전쟁이 끝나지는 않는다. 러시아는 시간을 벌기 위해 휴전을 이용할 뿐”이라고 경고했다.
같은 날 백악관 기자회견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푸틴 대통령과 건설적인 대화를 나눌 것”이라고 전망하며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 ‘영토 교환’과 ‘국경 변경’ 가능성을 언급했다. 그는 “공정한 거래라면 유럽연합(EU)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정상들, 그리고 젤렌스키 대통령에게 공개하겠다”면서도 “합의를 성사시키는 것은 내 역할이 아니며 양측에 최선의 합의가 이뤄지기를 바란다”고 말해 여지를 남겼다.
다만 젤렌스키의 강경 발언에 대해서는 “그가 헌법 승인을 받아야 한다고 말한 것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며 불쾌감을 드러냈다.
우크라이나와 유럽은 미·러 정상회담에서 푸틴 대통령의 요구가 일방적으로 수용될 가능성을 경계하고 있다. 이에 13일 프리드리히 메르츠 독일 총리 주도로 트럼프 대통령, 젤렌스키 대통령,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 마크 뤼터 NATO 사무총장 등이 참석하는 화상회의가 예정돼 있다.
로이터와 AFP에 따르면 회의의 핵심 의제는 우크라이나 영토 보전, 안전 보장, 대러 제재 유지다. 유럽 측은 회의 전 사전 협의를 거쳐 공동 입장을 조율하고 이를 트럼프 대통령에게 전달할 방침이다.
EU 당국자는 로이터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영토 문제에서 ‘교환’이라는 표현은 러시아 측 입장을 반영한 일방적 개념”이라고 지적했다. 유럽 정상들은 “국제적으로 확정된 국경은 무력으로 변경할 수 없다”는 원칙을 재확인하며, 우크라이나에 영토 양보를 강요하는 것은 위험한 선례가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특히 러시아가 이미 우크라이나 영토의 5분의 1을 점령한 상황에서 ‘교환’이라는 표현은 사실상 우크라이나의 일방적 손실을 의미할 수 있어 더욱 민감하다.
전선의 분위기는 전혀 평화롭지 않다. AP 통신에 따르면 동부 도네츠크 전방의 병사들은 휴전 협상 소식에 불신을 나타냈다. 제148여단 소속 드미트로 로비니우코우는 “지금 교전이 멈춘다면 합의의 첫 신호겠지만 그런 조짐은 전혀 없다”고 말했다. 제68여단의 병사 ‘미르츠헤’는 “평화 협상이 시작될 때마다 러시아의 공격이 오히려 더 거세진다”고 했으며, 제59여단 지휘관 세르히 필리모노우는 “휴전이 와도 평화는 오지 않는다. 우리는 장기전을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다.
러시아 국방부는 도네츠크 페도리우카 마을을 추가로 장악했다고 주장하며 공세를 지속하고 있다. AFP와 로이터에 따르면 러시아가 세운 도네츠크인민공화국(DPR) 정부 수장 데니스 푸실린은 소셜미디어에 “전선 상황을 완전히 통제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전투가 치열한 포크로우스크에서는 러시아군이 외곽을 압박하는 가운데 우크라이나군이 도심에서 방어전을 이어가고 있다. 전쟁 4년 차에 접어든 우크라이나는 심각한 인력 부족에 직면해 있다. 많은 병사들이 “물러설 곳이 없다”며 전투를 계속하고 있지만 전쟁이 곧 끝날 것이라는 기대감은 크지 않다는 것이 전반적인 분위기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최근 독일, 영국, 프랑스 등 13개국 정상과 연쇄 통화를 통해 지지를 확인했고, 인도 나렌드라 모디 총리, 사우디아라비아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 캐나다 마크 카니 총리와도 통화하며 외교적 노력을 강화하고 있다.
이번 미·러 알래스카 정상회담은 전쟁의 향방을 가를 중대한 분수령이 될 전망이다. 하지만 진정한 평화의 길을 열 것인지, 아니면 새로운 갈등의 씨앗이 될 것인지는 여전히 예단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정재철 기자 jcjung@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