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AI 시대 역행하는 유아 선행 사교육
선행 사교육의 끝판왕 ‘7세 고시’ ‘4세 고시’가 이제 낯선 단어가 아니다. 유아가 유명학원에 들어가기 위해 치르는 입학시험은 1차 독해·쓰기 평가와 2차 영어 인터뷰까지 ‘고시’라고 할 정도로 난이도가 높고 기출문제집까지 암암리에 팔린다. 최근 서울시교육청이 유아에게 레벨 테스트를 시행한 영어학원 11곳을 적발하면서 유아 고시의 실체가 명확히 드러났다. 심지어 유명학원에 입학하기 위한 대비학원도 존재한다.
유아 사교육은 어른들의 불안과 욕망이 아이에게 투영된 결과다. 아이를 7세 고시에 내모는 것은 지적학대에 가깝다. 유아기의 과도한 교육은 기억을 담당하는 해마를 손상시키고, 편도체 과활성화로 감정조절을 어렵게 만들어 뇌 발달을 저하시킬 수 있다. 스폰지처럼 모든 걸 흡수하는 무한한 잠재력을 가진 유아의 뇌에 지식을 구겨넣으며 정답 맞히기를 강요하는 것은 야만적이다.
7세 고시는 급변하는 AI 시대를 역행하는 교육이다. AI로 실시간 통번역이 가능한데, 유아들이 대학에 진학할 때까지 영어가 입시의 주요 과목으로 남아 있을지도 확실치 않다. 복잡한 수학문제를 AI가 척척 풀어주는 세상에 주입식으로 습득한 문제풀이 기술이 과연 미래에도 유효할까?
지금은 ‘정답’보다 ‘질문’이 더 중요해진 시대다. 유아기에는 세상을 향한 호기심을 키워야 하고, 이 호기심은 생성형 AI의 질문 상자에 독창적인 질문을 입력하는 원천능력이 된다. AI가 내놓은 답을 비판적으로 해석하고 새로운 질문을 던지는 상호작용을 통해 앎의 지평을 넓혀가는 것이 AI 시대 교육의 핵심이다.
AI 시대 유아교육의 핵심은 호기심 키우기
선행학습 역시 어리석은 선택이다. 학교 교육과정과 교과서는 아이의 인지발달 단계와 사고의 수준을 고려해 구성된다. 선행을 하면 내용을 소화하기 어려운 시기에 피상적으로 배우고, 막상 이를 소화해낼 수 있는 시기에는 아는 것으로 간주해 대충 넘어가는 악순환이 나타날 수 있다.
물론 옆집 아이가 방정식을 척척 푸는 것을 보면 부모로서는 불안해질 수 있다. 하지만 초등학생에게는 산술적 사고가 자연스럽고 중학생이 되어야 대수적 사고를 할 수 있는데, 방정식을 푸는 것은 대수적 단계에서 가능한 일이다. 초등학생이 선행학습으로 방정식을 푼다면 대부분 기계적인 풀이의 모방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선행학습은 ‘일어서서 영화보기’다. 영화관에서 앞줄 관객이 일어나면 뒷줄 관객이 어쩔 수 없이 따라 일어서게 되는데 선행학습도 마찬가지다. 일어서서 관람해도 결국 똑같은 영화인데 피로감만 쌓이는 것처럼 선행학습은 비효율적이지만 ‘죄수의 딜레마’ 상황이라 할 수 있다. 모두가 선행 사교육을 시키지 않음으로써 사회 전체에게 유익한 최선의 선택이 있지만, 상대를 믿지 못하기 때문에 각자가 선행 사교육을 시키는 소모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
과도한 사교육으로 인한 영유아의 인권침해를 해소하기 위해 국회에 관련 법률 개정안이 발의되어 있다. 하지만 부모의 교육권과 아동의 학습권 침해라는 반발도 만만치 않다. 저출생의 주요 원인이기도 한 선행 사교육은 법적규제보다는 인식의 개선이 더 원천적인 접근이다.
국가교육위원회 통해 공론화 필요
3년 전 출범하고도 제 역할을 못한 ‘국가교육위원회’는 교육의 논쟁적인 사안에 대한 공론화를 주요 업무로 하는데, 국가교육위원회에서 선행 사교육이 가져오는 폐해에 대해 숙의하고 사회적 합의를 이루는 장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