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체파 미술은 형태를 해체한 시각언어였다
정광균의 80일간 유럽미술관 산책
모더니즘의 폭발, 시선과 지각의 해방 (15)
필자는 ‘나 홀로 자유여행’으로 버킷리스트 중 하나였던 ‘80일간의 유럽미술 여행’을 다녀왔다. 유럽 12개국의 주요 미술관 순례 경험을 바탕으로 ‘르네상스 이후의 고전, 모던 미술과 명작이야기’를 재조명해본다. 지금까지는 신 중심의 중세미술에서 인간중심의 미술로 전환된 15~16세기의 르네상스, 매너리즘 미술, 종교개혁과 대서양 시대의 도래로 교황, 국왕, 귀족, 시민 계급 중심의 미술로 전환된 17~18세기의 바로크, 로코코 미술, 프랑스대혁명, 산업혁명의 영향으로 근대사회로 전환된 18~19세기의 신고전주의, 낭만주의, 사실주의 미술, 19세기 후반~20세기 초의 인상주의, 후기 인상주의 미술을 살펴보았다. 미술은 역사와 현실을 반영하는 ‘시대의 거울’이다. 그러나 19세기 후반 이후의 근대사회는 산업혁명의 심화, 과학기술의 발전, 제국주의의 확대 등으로 정신적 위기를 맞이하면서 미술은 ‘시대의 실험’이 된다. 이에 따라 르네상스 이후 약 500년간 지속된 ‘고전미술’은 균열, 해체, 붕괴로 이어지고 모더니즘이 등장하게 된다. 미술의 ‘패러다임’이 바뀌게 된 것이다. 모더니즘의 서곡이었던 인상주의를 비판적으로 계승한 후기 인상주의는 모더니즘의 서막이었다. 이제 20세기 초반의 야수파, 입체파 미술이 ‘색채와 형태의 해방’을 추구하면서 모더니즘 미술은 본격적으로 폭발하게 된다.
입체파(Cubism)는 야수파에 이어 20세기 초반 프랑스에서 나타난 미술 사조다. 미술의 기본인 ‘형(형태)과 색(색채)’에서 야수파가 ‘색채를 해방’한 미술이었다면 입체파는 ‘형태를 해체’한 미술이었다. 이렇게 두 미술은 500년간 지속된 고전미술을 붕괴시키면서 모더니즘을 본격적으로 폭발시켰다. 마치 불꽃처럼 치솟아 회화의 전통을 불사르며 새로운 감각과 시각을 밝히는 횃불과 같았다.
입체파는 야수파와 함께 조형 언어를 새롭게 쓴 미술로서 20세기 회화를 견인한 ‘쌍두마차’였다. 그렇다면 왜 입체주의가 아니고 입체파인가? 입체파도 야수파처럼 일본이 번역한 것을 그대로 받아들인 명칭이라 논란의 여지가 있다. 사실 입체는 3D 같은 이미지다. 그런데 입체파 그림은 ‘입체적’인 사물을 해체하여 ‘평면적’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따라서 입방체(Cube)+사조(~ism, 주의)인 큐비즘(Cubism)으로 부르는 게 원뜻에 충실하다. 여하튼 입체파 미술은 고전미술의 원근법, 명암법 등에 따른 ‘환영(illusion)’을 거부하고 회화의 본질에 맞게 캔버스 위의 ‘평면화’로 재구성한 ‘시각언어’였다.
또한 입체파는 ‘보는 방식의 틀’을 깨트린 미술이었다. 단일 시점에서의 재현을 거부하고 다중 시점에서 사물을 분해하고 재조합한 것이다. 그렇기에 ‘시선과 지각을 해방’한 미술이었다. 입체파 거장인 피카소와 브라크는 결국 ‘사물의 해체’로부터 아이러니하게도 ‘사물은 버리는’ 추상화의 문을 열었다. 1936년 뉴욕현대미술관(MoMA)의 초대 관장인 알프레드 바는 입체파를 추상미술의 결정적 전환점으로 보고 ‘입체파와 추상미술’의 계보를 세잔-입체파-기하학적 추상화로 제시했다. 이처럼 입체파는 모더니즘 미술의 변곡점이었다. 입체파에서 파생되어 색채와 율동을 강조한 오르피즘(Orphism), 입체파의 영향으로 속도와 운동을 강조한 미래주의(Futurism), 구성주의 등이 연이어 등장하면서 모더니즘 미술은 꽃을 피우게 된다.
입체파 미술은 1907년 세잔의 회고전을 계기로 등장
입체파 미술은 1907년 ‘세잔의 회고전’을 계기로 등장했다. 혁신적인 미술을 지향했던 살롱도톤 (가을 살롱)이 세잔 사후 1년 만에 그의 미술을 재조명한 것이다. 주최는 살롱도톤이었지만 그 뒤에는 마티스, 브라크, 피카소 등의 열망이 작용하였다. 그들은 “자연을 원기둥, 구, 원뿔로 보아야 한다”라고 말한 세잔으로부터 새로운 조형 언어의 실마리를 찾고자 했다. 세잔의 회고전은 단순한 추모행사가 아니라 입체파의 태동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그해 피카소는 입체파의 문을 연 ‘아비뇽의 처녀들(1907)’을, 브라크는 이듬해 남프랑스의 에스타크에서 기하학적 풍경화인 ‘에스타크의 집들(1908)’을 그렸다. 이 작품을 본 미술비평가 루이 보셀이 “모든 것이 큐브(cubes)처럼 보인다”라고 비꼰 것이 큐비즘의 유래가 되었다.
여기서 잠깐 ‘모더니즘’과 본 글의 제목인 ‘르네상스 이후의 고전, 모던 미술’의 ‘모던 미술’, 그리고 ‘현대미술’의 경계에 대해 짚고 넘어가고자 한다. 서양 미술사는 큰 틀에서 고전-(근대)-모더니즘-현대미술이나 현대미술을 분리해서 고전-모더니즘-포스트모더니즘(1960년대 후반 이후)-컨템포러리(1980년대 후반 이후, 동시대 미술) 미술로 구분한다. 그런데 근대, 모더니즘, 현대미술을 혼용하거나, 모더니즘, 또는 현대미술의 시작을 인상주의, 또는 입체파, 또는 표현주의로부터 보는 등 중구난방이다. 이는 영어(Modern)의 번역상 문제도 있지만 ‘오늘의 현대는 내일의 과거’가 되는 법인데도 미술사가, 비평가들이 시대의 상대성과 기준시점을 명시하지 않은 데서 기인한다.
미술사는 ‘최고의 인문학’이란 말이 무색할 정도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문제에 대해 학술적으로 일치된 견해는 없다. 필자는 유럽미술관 순례 경험을 바탕으로 1860년대~1960년대(인상주의~2차대전 전후) 유럽의 ‘모던 미술(Modern Art)’을 중심으로 이 글을 쓰고 있다. 다만, ‘모던 미술’과 ‘모더니즘’은 차이가 있다. 전자가 예술적 자율성에 따라 시각언어를 창조한 ‘회화 중심’의 혁신적 미술이라면 후자는 회화를 포함 문학, 음악, 철학 등에서 나타난 예술적 흐름으로 ‘미학 정신’의 관점에서 본 미술이라 하겠다.
입체파 미술은 파리의 퐁피두센터와 4곳의 피카소미술관에 분산
필자는 지난해 6월 2일부터 5일간은 마드리드의 소피아국립미술관, 바르셀로나의 피카소미술관을, 6월 11일부터 17일간은 파리의 퐁피두센터, 피카소미술관, 몽마르트르, 몽파르나스를, 6월 23일은 앙티브의 피카소미술관 등을 방문하면서 입체파 미술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았다. 둘러본 결과 입체파 미술은 퐁피두센터가 가장 많이 소장하고 있었다. 이는 퐁피두센터가 ‘국립 현대미술관’으로 출범하면서 입체파, 야수파 미술을 현대미술의 기점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피카소미술관은 바르셀로나, 파리, 앙티브 외에도 이전에 방문했던 피카소의 고향인 말리브까지 총 4곳이 있다. 그중 바르셀로나는 피카소의 젊은 시절 작품이 많았고 앙티브는 후기의 밝은 작품이 많았다. 특히 15세기 고성(그리말디 성)을 개조한 앙티브미술관은 고풍스럽고 지중해 바다와 잘 어우러져서 그 자체가 그림이었다.
파리 북쪽의 몽마르트르와 남쪽의 몽파르나스는 아방가르드 미술의 요람이다. 몽마르트르는 인상주의, 야수파 등 모더니즘의 산실이면서 입체파 미술의 탄생지다. 사크레쾨르 성당 근처의 ‘바토 라브아르’는 피카소가 1907년 ‘아비뇽의 처녀들’을 완성한 곳이다. 지금은 파리시청이 관장하는 예술가들의 스튜디오 겸 거주공간으로 사용하고 있어 문 앞에서 발길을 돌려야 했다. 몽파르나스는 벨에포크 시대 파리가 센강 이남 지역을 개발하면서 문화의 중심지가 된 지역이다. 파리 예술의 중심도 자연 몽마르트르에서 몽파르나스로 옮기게 되어 피카소도 1910년대 중반에는 그곳으로 이주하여 브라크와 협업하면서 입체파 미술을 꽃피웠다. 몽파르나스에는 그 두 사람뿐만 아니라 모딜리아니, 샤갈, 헤밍웨이, 사르트르 등이 자주 갔던 카페(라 로통드, 르 셀렉트, 라쿠폴 등)들이 있어 벨에포크 시대 카페문화의 향수를 접할 수 있다.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은 입체파의 시발점이 된 기념비적 작품
이제 입체파 대가들의 작품을 살펴본다. 파블로 피카소(1881~1973)는 20세기 미술의 대체 불가한 아이콘이다. 서양 미술 대가 중 피카소만큼 오래 살면서(92세 사망) 생전에 성공한 화가는 없었다. 그렇기에 그가 남긴 예술적 업적과 개인적 삶은 이야기가 차고 넘친다. 그는 죽기 전까지 부와 명예, 권력을 모두 누렸지만 수많은 여성 편력 등으로 화제와 비난을 몰고 다녔다. 그러나 미술사적으로는 명불허전 20세기 회화의 지도를 바꾼 혁신의 기수였다.
화가로서 피카소는 어떠한 삶을 살았는가? 스페인 남부의 항구도시인 말라가에서 태어난 피카소는 미술학교 교사이며 화가인 아버지로부터 미술을 배웠다. 일설에 의하면 그의 아버지는 피카소가 13세 때 자신보다 재능이 뛰어난 것을 알고 붓을 꺾었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한 이야기지만 그의 재능이 DNA로부터 온 것은 확실하다. 이후 피카소는 바르셀로나, 마드리드에서 아카데미 미술교육을 받았으나 곧 전통미술에 염증을 느끼고 인상주의, 상징주의, 스페인 전통 회화의 영향을 받으면서 자신만의 미술을 추구한다. 몽마르트르 시절에는 가난, 고독, 죽음 등을 주제로 청색 계열의 그림을 그린 ‘청색시대(1901~1904)’, 사랑, 서커스, 유희 등을 주제로 장밋빛 계열의 그림을 그린 ‘장미 시대(1904~1906)’로 색채 중심의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1907년 세잔의 회고전을 계기로 구조중심의 그림으로 전환한다.
그는 브라크와 함께, 또는 따로 분석적(1908~1912), 종합적(1912~1914) 큐비즘을 창시한 것이다. 제1차 대전 후에는 신고전주의, 초현실주의 그림에 손을 대기도 하였으며 스페인 내전 시기에는 ‘게르니카(1938)’와 같은 반전 그림을, 프랑스 공산당 가입 후에는 한국전쟁의 참상에 대한 보도를 접하고 ‘한국에서의 학살(1951)’이라는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말년에는 세라믹, 조각, 판화 등 다양한 매체를 시도하면서 주로 여성, 황소, 예술가 자화상 등을 그렸다.
피카소는 생애 총 5만 점의 작품을 남겼는데 그 중 회화는 약 1만3500여 점이다. 뉴욕현대미술관(MoMA)이 소장하고 있는 ‘아비뇽의 처녀들(1907)’은 입체파의 대표작이다(그림 1). 작품완성 당시 브라크가 “마치 폭탄 같다”라고 말할 정도여서 몇 년간은 전시도 못 했다고 한다. 그러나 큐비즘을 실험한 최초작품이어서인지 피카소가 계속 보관하고 있었는데 MoMA의 초대 관장인 알프레드 바가 1939년 현대미술의 혁신적인 작품으로 구매하면서 빛을 보게 된 것이다.
필자는 과거 미국 체류 시 본 적이 있고 피카소의 기념비적 작품이라 소개한다. ‘아비뇽’은 과거에 매춘 굴이 있었던 바르셀로나의 아비뇽 거리를 의미한다. 5명의 누드 여성 중 맨 왼쪽의 1명과 오른쪽 2명의 여성은 피카소가 파리의 트로카데로 민속박물관을 방문한 후, 아프리카 원시 가면과 이베리아 고대 조각에서 영감을 받고 형식적 요소를 결합해서 그린 것이다. 원근법, 해부학 등을 무시하고 다중 시점에서 본 것처럼 표현한 것이다. 피카소가 “나는 찾지 않는다. 발견할 뿐이다”, “좋은 예술가는 모방하고, 위대한 예술가는 훔친다”라고 한 말은 단순한 흉내가 아니라 본질을 훔쳐 와 완전히 자기 것으로 만든다는 의미일 것이다.
브라크의 에스타크의 집은 기하학적 풍경화로 큐비즘의 유래
조르주 브라크(1882~1963)는 피카소와 전설적인 콜라보레이션으로 입체파 미술을 구축한 화가다. 피카소가 강렬하고 급진적이었다면 브라크는 구조와 조화를 더 중시했지만 두 사람은 큐비즘을 창시한 ‘예술적 동반자’였으며 아방가르드적 혁신 미술을 창조한 ‘예술적 전우’였다. 그러나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은 두 사람을 갈라놓았다. 브라크가 징집되고 머리부상으로 전선에서 후송되면서 두 사람의 예술적 동행은 중단되었고 피카소는 더욱 실험적인 방식으로 그림을 그리면서 모더니즘을 선도하게 되었다. 그러나 브라크는 “우리는 자석이었다”라고 말할 정도로 두 사람 관계는 끈끈해서 입체파 전성기 때는 작품에 서로 서명하지 않았다고 한다. 누가 그렸는지는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브라크는 파리 근교의 아르장튀유 출신으로 소년 시절에는 도장업(페인트)을 한 부친을 따라 일을 하면서 르아브르 야간 미술학교에서 미술을 배운 후 1900년 파리로 건너와 미술 아카데미에서 전통 회화교육을 받았다. 처음에는 인상주의, 야수파 그림에 영향을 받았으나 1907년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을 보고 충격을 받은 후, 세잔 회고전을 계기로 피카소와 가까워지면서 입체파 미술을 주도하게 되었다. ‘에스타크의 집들(1908)’은 퐁피두센터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브라크의 대표작이다(그림 2). 이 작품은 원래 살롱도톤에서 거부당한 후, 브라크가 파리의 한 화랑에서 개인전을 열었는데 앞서 언급했듯이 이를 본 비평가 루이 보셀의 조롱으로 큐비즘의 기원이 되었다. 그림은 세잔의 기하학적 단순화 기법을 활용해서 건물과 나무를 입체적 덩어리로 표현하였다. 색채는 절제하고 형태와 구조에 집중함으로써 집, 나무 등의 “형태를 해체”한 기하학적 풍경화의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뒤샹의 ‘계단을 내려오는 나체 No.2 는 미래주의자들이 극찬한 그림
마르셀 뒤샹(1887~1968)은 기성 변기를 뒤집어 놓은 ‘샘(1917)’이란 작품으로 ‘무엇이 예술인가?’에 대한 정의를 완전히 바꾼 화가다. 그는 프랑스 루앙 근교 작은 마을의 예술가 집안 출신이다. 1904년에는 파리로 이주하여 줄리앙 아카데미에서 수학 후, 화가의 길을 걸었다. 초기에는 후기 인상주의, 야수파의 영향을 받았으나 곧 분석적 큐비즘으로 관심을 돌렸다. 뒤샹은 ‘샘’ 작품으로 개념미술, 다다이즘, 초현실주의 미술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나 이 작품에 앞서 입체파의 영향을 받은 미래주의자들이 극찬한 그림을 그렸다. 어떻게 보면 입체파와 미래주의 경계선에 있는 그림이지만 본질은 입체파와 연결된 작품이기에 여기서 소개한다.
미국 필라델피아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계단을 내려오는 나체 No. 2 (1912)’가 바로 그 작품이다(그림 3). 한 누드 인물(여성)이 계단을 내려오는 일련의 동작을 기하학적 분절과 연속적인 동작의 중첩으로 보여주는 그림이다. 움직임과 시간을 해체, 재구성하여 마치 연속사진이나, 슬로비디오 같다. 이 작품은 원래 파리의 살롱 데 앙데팡당(Salong des Indépendants, 1884년 설립) 에 출품하려 했으나 당시 입체파 작가들이 너무 기계적이고 동적인 이미지라며 반대해 거절당한 후, 1913년 뉴욕 아모리 쇼(Amory Show)에서 전시되면서 큰 파장을 일으켰다. 그 이후 뒤샹은 ‘샘(1917)’과 모나리자 복제본에 콧수염과 턱수염을 그린 ‘L.H.O.O.Q(1919)’ 작품으로 연속 파란을 일으키며 미국 현대미술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입체파는 ‘시대를 실험’한 모더니즘 미술의 핵심 사조
이렇게 입체파 미술은 형태를 해체하고 재조합한 ‘시각언어’였다. 이는 피카소와 마티스의 공동 실험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형태로 사고하라”라는 세잔의 철학이 전제되었다. 그러나 끊임없는 실험을 통해 미술의 패러다임을 바꾼 피카소가 없었다면 모더니즘 미술은 폭발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기에 피카소는 ‘변신과 혁신’의 기수였다. 그렇다. 입체파 미술은 고전미술의 문법에 종지부를 찍으면서 ‘시대를 실험’한 모더니즘 미술의 핵심 사조였다.
여기서 입체파 미술은 몇 가지 중요한 시사점을 남긴다. 첫째, 입체파는 ‘보고, 느끼는 회화’에서 ‘사유하는 회화’로 바꾼 미술이었다. 즉, 미술의 기능을 사유로 이동시킨 것이다. 둘째, 입체파는 분석적인 시각을 제시한 미술이었다. 즉, 시각 경험이 아닌 인식체계로서의 회화로 바꾼 것이다. 셋째, 입체파는 추상의 정당성을 제시한 미술이었다. 즉, 회화가 구상에서 추상으로 나아가는 문을 연 것이다. 이제 미술의 패러다임은 바뀌었다. 고전미술이 ‘보는 미술’이었다면, 인상주의, 야수파는 ‘느끼는 미술’이었고 입체파는 ‘생각하는 미술’이 된 것이다. 그러나 입체파 미술은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종언을 고하고 동시대 독일에서는 후기 인상주의, 야수파의 시각적 자극을 독일적 정신성으로 재해석한 표현주의가 꽃을 피우게 된다.
정광균 칼럼니스트는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제19회 외무고시에 합격하여 외교관의 길을 걸었다. 주토론토 총영사와 주이집트 대사를 역임하며 외교 현장에서 풍부한 경험을 쌓았다. 외교관 은퇴 후에는 학문의 길로 전환하여, 한양대학교 관광학과에서 DMZ 관광개발과 관광자원 분야를 연구하며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남서울대학교 관광경영학과 객원교수와 한양대학교 관광학과 및 국제관광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며 교육자로서도 활동했다. 현재는 추계예술대학교 대학원 문화예술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서양미술사 분야의 학위를 준비 중이다. 동시에 한국미술협회 산하 일원회와 현대사생회 회원으로 활동하며 화가로서도 활발히 작품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필자는 외교관으로서의 국제적 시각, 관광학 전문가로서의 학술적 접근, 현장 예술가로서의 실제적 안목, 서양 미술사 연구자로서의 전문성을 두루 갖추고 있다. 이러한 다면적인 배경을 바탕으로, 단순한 여행기나 미술사 해설을 넘어서는 심도 있는 연재를 선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