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태진의 미국 톺아보기
‘빅사이클’의 전환점, 2025년 미국 경제의 경고등
“재정적자는 언젠가는 반드시 해결해야 할 문제다. 다만 그 ‘언제’가 언제인지 아무도 알 수 없다는 게 더 큰 문제다. 2년이 될지, 20년이 될지 아무도 모른다.”
올해 은퇴를 앞둔 ‘오마하의 현인’ 워런 버핏 버크셔 해서웨이 회장이 지난 5월 남긴 이 말은 단순한 회고가 아니다. 그는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들이 수십년간 근본적인 개혁 대신 임시방편에만 의존해 온 현실을 날카롭게 지적한 것이다.
언젠가 그 미봉책들이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는 날 세계 경제는 감당하기 어려운 충격에 직면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어쩌면 이 말은 세계 각국의 정부와 의회, 그리고 중앙은행들을 향한 그의 마지막 경고였는지도 모른다.
미국 재정적자 위험 경고한 워런 버핏
워런 버핏과 마찬가지로 올해 은퇴를 선언한 또 다른 인물인 세계 최대 헤지펀드 ‘브리지워터 어소시에이츠’의 창립자 레이 달리오 역시 미국의 부채 문제를 심각하게 바라본다. 그는 최근 출간한 '국가가 파산하는 방법(How Countries Go Broke)'에서 ‘빅사이클(Big Cycle)’이라는 개념을 통해 현재의 위기를 설명한다.
달리오에 따르면 역사는 약 80년을 주기로 커다란 흐름의 전환기를 겪는데 이 주기에는 25년 정도의 오차가 존재한다. 이러한 사이클은 △부채와 신용 △국내 질서 및 무질서 △외부 지정학적 관계 △자연재해 △기술혁신 등 다섯 가지 요인에 의해 결정된다. 그리고 이 흐름의 전환점은 대체로 경제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부채가 누적되는 시점에서 찾아온다.
그는 이때 세계 질서를 지배하던 ‘제국’이 외국에 자국 부채를 전가하거나 적성국의 자산을 몰수하며 새로운 형태의 화폐를 도입하는 등의 조치가 동반된다고 설명한다. 달리오는 이러한 현상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벌어지고 있으며 1945년을 기점으로 시작된 현재의 ‘빅사이클’이 2025년을 계기로 본격적인 전환기에 접어들 것이라고 경고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현재의 세계 경제를 되돌아보면 그 경고는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다. 1945년 브레튼우즈 체제 이후 세계 경제 질서를 주도해온 미국은 1980년대부터 정부 부채가 꾸준히 증가해왔다. 몇차례의 금융위기와 코로나 팬데믹을 거치며 부채는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무분별한 국채 발행으로 이를 메워오던 방식은 이제 사실상 수습이 불가능한 단계에 이르렀다.
이전 정부들과는 성격이 전혀 다른 트럼프행정부가 2018년 전격적으로 관세전쟁을 단행한 것도 달리오의 관점에서는 결코 역사적 우연이 아니다. 실상 트럼프정부의 관세전쟁은 외국 기업과 소비자에게 비용을 전가하고, 이를 통해 확보된 재정수입으로 국내 부채 부담을 줄이려는 전략의 일환이었기 때문이다.
트럼프 관세전쟁도 부채감축 전략의 일환
더욱이 최근에는 미국이 100년 만기 무이자 국채를 발행해 이를 동맹국들에게 사실상 강매할 것이라는 이야기마저 나오고 있다. 이와 동시에 미국은 중국과 러시아 등 적대국가들에 대한 경제봉쇄 및 자산제재를 강화하고 있으며, 달러화를 대체할 수 있는 스테이블코인 도입 논의 또한 수면 위로 떠올랐다. 이 모든 움직임은 기존 질서가 균열되고 있으며 새로운 질서가 태동하고 있음을 암시하는 신호로 읽힌다.
달리오는 이 같은 위기상황에 대응하기 위한 해법으로 정부 지출을 최대한 삭감할 것, 세금을 인상해 재정적자의 규모를 최소화할 것, 실질금리를 인하해 경기위축을 방지할 것을 제안한다.
지금의 경제 위기는 천문학적 규모의 부채에서 비롯된 만큼 정부는 허리띠를 졸라매 부채를 줄이고, 동시에 금리를 낮춰 투자와 소비를 촉진함으로써 경제성장의 불씨를 살려야 한다는 주장이다. 물론 금리가 인하될 경우 국채를 보유한 투자자들은 실질 수익률이 낮아지겠지만, 재정건전화로 채권가격이 상승하게 된다면 이들은 금리인하의 손실을 일정 부분 상쇄할 수 있게 된다.
사실 이러한 분석은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미 오래전부터 다양한 형태로 예견되어 왔으며 많은 사람들이 그 심각성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
가령 2011년 미국의 신용등급 강등을 계기로 보스턴컨설팅그룹(BCG)이 펴낸 '깡통을 걷어차지 마라(Stop Kicking the Can Down the Road)' 보고서는 미중 간 무역 불균형과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각국이 떠안게 된 과도한 부채 문제를 정면으로 지적했다.
BCG는 문제의 본질은 모두가 그 심각성을 알고 있음에도 정치권이 근본적 해결책보다는 문제를 뒤로 미루는 태도를 지속하고 있다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마치 길 위의 깡통을 줍는 대신 그저 앞으로 걷어차며 시간을 벌려는 식의 임시방편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당시 해당 보고서는 몇 가지 근본적 개혁안을 제시한 바 있다.
BCG는 기업혁신을 통한 생산성 향상을 통해 더 높은 경제성장을 추구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또 정부부채가 GDP의 90%를 초과할 경우 실질 경제성장률이 1% 이상 하락한다는 연구 결과를 근거로 유럽연합(EU) 마스트리히트 조약이 정한 정부 부채 비율 60%, 재정적자 비율 3%를 최대한 준수할 것을 제안했다.
이와 함께 복지개혁, 금융시스템 개편, 노동시장 유연화 등 구조적 개혁을 추진함으로써 재정적자 폭을 줄이고, 동시에 기업이 성장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경제성장의 선순환을 유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오랜 시간 누적되어 온 부채의 악순환 고리를 끊자는 것이 이 보고서의 주된 취지다.
그러나 이러한 연구들은 현실 정책에 제대로 반영되지 못했다. 2008년 약 10조달러였던 미국 연방정부 부채는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인한 금융시장 붕괴와 실물경제 위축, 세수감소 등의 여파로 2017년 20조달러를 넘어섰다. 물론 BCG 보고서 발표 시점 전후로 오바마행정부는 향후 12년간 재정적자를 4조달러 감축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방안은 진보와 보수 양측 모두로부터 비판을 받으며 사실상 추진력을 잃었다. 해당 감축방안에는 2023년까지 메디케어와 메디케이드 예산 3000억달러를 줄이고 총 4800억달러 규모의 복지예산을 삭감하는 한편, 고소득층 세금감면 혜택을 축소하거나 폐지하는 이른바 ‘부자 증세’가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이러한 개혁의 실패는 반작용을 낳았고 그것이 2017년 트럼프행정부의 등장을 촉발한 배경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그리고 2024년 트럼프의 재집권 역시 이러한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 실제로 트럼프정부는 지난달 2017년 도입된 개인소득세 감세를 영구 연장하고, 기업 세제 혜택 확대, 주·지방세 공제 한도 폐지, 팁·초과근무수당에 대한 일시적 면세 조치 등을 포함한 ‘크고 아름다운 법’ 세제개편안에 서명했다.
미국 의회예산처(CBO)는 이 법안이 향후 10년간 미 연방 재정적자를 총 3조4000억달러 늘릴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중의 입맛에 맞는 정치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사실이 이미 확인된 현실에서 미국의 재정적자 문제 해결은 앞으로도 요원한 과제로 남을 가능성이 높다.
개혁 추진할 정치적 결단 부재, 진짜 위기
요컨대 결국 지금의 재정위기는 아무도 해법을 모르는 미지의 영역이 아니다. 오히려 문제의 본질은 그 해법이 불편하고 고통스럽고 대중의 비위를 거스를 수 있기 때문에 외면당하고 있다는 데 있다.
누구나 ‘언젠가’ 해결해야 할 문제임을 알고 있지만 그 ‘언제’를 지금으로 만들 용기, 반발을 감수하고 개혁을 추진할 정치적 결단이 없다는 것이 진정한 위기다. 앞으로도 깡통을 걷어차며 ‘빅사이클’의 전환점을 맞이할지, 용기와 결단을 통해 역사적 흐름을 되돌려놓을지 지켜볼 문제다.
법무법인 서로변호사·MB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