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진단
대통령의 8.15 경축사와 한반도의 운명
“남북한 간 특수관계를 인정한 1991년 노태우정부 당시의 남북기본합의서 내용을 다시 꺼냈다.”(탈북 외교관 출신 태영호 전 민주평통 사무처장)
“지난 정부 ‘8.15 통일 독트린’의 반북 흡수통일, 자유의 북진론을 폐기한 것이다.”(통일부 대변인 공식 언론 브리핑)
“1991년 남북한 동시 UN 가입 이후 한반도에 두 국가라고 하는 것이 국제적으로 이미 인정되었고, 평화유지는 가장 현실적인 노력이다.”(김종인 전 국민의힘 비대위원장)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주 8.15 경축사를 통해 한 마디로 ‘상호 존중과 평화 공존’의 대북 통일 정책을 발표했다. 위 코멘트는 이에 대한 평가다.
한국의 대통령은 일년 내내 우리 국민과 국제사회를 상대로 다양한 메시지를 던진다. 3.1절도 있고, 어린이날도 있으며, 부처님 오신날과 성탄절에도 대통령의 메시지는 발신된다. 8.15 경축사의 경우 한반도 문제와 대외관계에 대한 대통령의 가장 의욕적인 정책 메시지가 담긴다는 게 정설(定說)이다. 위에 소개한 세 사람의 코멘트를 좀 더 파고들어가 보자.
북한이 느끼는 위협의식 해소가 관건
1990년을 전후로 국제질서의 냉전대결이 끝나면서 탈냉전의 온기는 한반도에도 퍼졌다. 1985년 소련 지도자 고르바초프의 등장 이후 냉전질서의 균열이 곳곳에서 발견되었고 당시 노태우 정부 역시 1988년 올림픽 개최를 앞두고 모든 측면에서 한국 사회의 정상성을 증명하고 싶었다. 6개 항에 걸친 ‘7.7 선언’이 발표되었고 북한과의 소모적인 대결에 마침표를 찍고, 북한을 있는 그대로 대하겠다는 원칙이 정립된 것이다.
7.7 선언은 크게 두 가지 갈래로 뻗어 나갔다. 하나는 ‘북방정책’이라는 대외관계 차원으로 이어져 소련 서기장 고르바초프와 당시 중국의 국가주석이었던 양상곤이 제주도를 찾게 만들었다. 그리고 남북 관계 차원으로 또한 이어져 1991년 12월의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남북기본합의서)’와 ‘한반도 비핵화공동선언’이라는 결실을 만들어 냈다.
서로 많이 다르지만 남북한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존중해야만 교류와 협력이 가능하고, 궁극적으로 통일의 토대를 만들 수 있다는 전략적 판단을 작용한 것이다. 너무 갑작스럽게 퍼진 탈냉전의 온기에 한국은 흥분했고 북한은 더 위축되었다. 한소 수교와 한중 수교가 이어졌고 지면에 옮기기 어려운 복잡한 배경이 있긴 하지만 1993년 북한의 핵위기가 수면 위로 부상하게 된다.
대부분의 사회주의 국가들의 체제 전환을 목격하고, 외교적으로 절친이었던 중국과 소련이 한국과 관계 정상화를 시작하는 상황을 지켜보면서 북한은 생존을 위해서는 핵개발만이 유일하게 기댈 언덕이라고 믿었을 수 있고, 24년 후인 2017년에 ‘핵무력 완성’을 달성할 것이라는 의지를 다졌기 보다는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급한 불을 끄고 보자는 심정으로 핵무기 개발 카드를 꼭 쥐고 있었을 것이다. 물론 2012년 김정은 리더십 이후의 핵개발 과정에는 나름의 정교한 프로세스가 있었다.
핵무력을 완성하고 굴욕감을 맛보기는 했지만 미국 대통령과 두 차례의 담판도 벌여봤고 우크라이나 전선에 1만명이 넘는 군사를 파견해 최고의 실전 경험을 쌓은 북한으로서는 앞으로 거침이 없을 것이다. 더구나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종전 이후 국제안보 재편 과정에서 글로벌사우스의 목소리는 어떤 형태로든 더 커질터인데 한국을 별개의 국가로 설정한 북한의 입장에서는 이들의 목소리가 든든한 우군의 함성처럼 들릴 것이다.
1991년 기본합의서 정신에 따라 우리는 북한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면서 상대했던가? 일부에서는 분명히 무슨 소리냐고 반문하면서 당시 노태우정부의 상호인정과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은 진정한 의미에서 북한 체제를 인정하기보다는 냉전 종식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 북한 역시 얼마 버티지 못할 것이라는 판단에 따른 전략적 선택이었다고 필자를 나무랄 가능성이 있다. 또한 전세계에 유례가 없는 핵무기 개발에 몰두하느라 자신들의 인민들을 궁핍과 고통에 빠뜨리는 리더십에 무슨 미래가 있겠냐고 비판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한가지 불변의 진리는 북한 리더십의 비정상적인 버팀을 가능케 하는 핵심 배경에는 북한이 느끼는 특유의 위협의식이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이다. 2차 대전 이후 3대에 걸친 80년의 리더십 유지 또한 전 세계에 유례가 없지만 북한 정권이 무엇을 선택하든 인민을 집결시키는 동원력 역시 바로 그 위협의식에서 나온다는 사실이다. 미국의 핵우산을 강화하든, 일본과의 한미일 협력을 약속하든, 트럼프 행정부의 요구대로 국방비를 인상하든 동시에 북한이 느끼는 위협을 해소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추진하는 모든 대북정책이 효과를 거둘 수가 있기 때문이다. 30여년 전 기본합의서의 상호 존중은 의미 있는 접근이었다.
통일독트린 폐기를 공식화 한 이유
두번째로 ‘통일 독트린’ 폐기 공식화의 문제다. 한국은 미국처럼 엄격하지는 않지만 ‘보수-진보’로 나뉜 양당 구도가 견고한 셈이다. 1987년 민주화 이후 이념적 지향점이 다른 성격의 두 정당이 지속적으로 번갈아 가면서 집권해 왔다. 미국이 낙태와 동성애 사안으로 또 유럽이 이민자와 환경문제로 이념이 갈린다면 한국은 단연코 북한 문제가 이념 구분의 한 가운데에 있다.
동맹 문제, 미중 간 균형외교, 한미일 협력, 자체 핵무장, 남남 갈등 등 한국 사회가 직면한 대부분의 이념적 사안들은 어떤 형태로든 북한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유권자들이 이재명 대통령을 선택하는 순간에 이미 지난 정부 통일정책의 폐기는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다.
이전 정부 대북정책의 평가를 떠나서 북한을 상대로 흡수통일 관련한 일체의 노력을 추구하지 않겠다는 메시지가 확실하게 전달되기 위해서는 기존의 대북정책과는 사뭇 다른 내용이었던 통일 독트린을 공개적으로 폐지하겠다는 정부의 공개 설명이 필요했을 수도 있다. 이 부분은 정책의 문제라기보다는 정치의 영역으로 보인다. 다만 그렇지 않아도 통일문제의 이념성을 잘 관리해야 하는 이재명정부의 입장에서 자연스럽게 폐기하면 될 일이지, 공식적인 발표를 통해 일부 국민들의 정서를 긁어 부스럼을 만들 이유가 있을까 싶다.
북한이 직면할 ‘개혁의 딜레마’는 어떻게
마지막으로, 김종인 전 위원장의 코멘트다. 과거 외교관들의 자서전에도 많이 소개되어 있고 학술적으로는 연구가 꽤 되어 있지만 현재까지도 당시 정부가 무슨 생각으로 남북한 동시 가입을 선택했는지 의문을 가지게 된다. 투박하게 얘기해서 세계가 천지개벽을 경험하고 있으니 이제는 북한과 두루 잘 지내보자, 그러다 보면 통일의 문도 열리겠지, 뭐 이런 생각의 발로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미 오래전부터 한국과의 경쟁을 포기한 북한의 입장에서는 유엔을 통한 국제법적 주권의 인정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소중한 의미를 가질 것이다. ‘두 개 국가론’을 포함해 북한이 주장하는 대부분의 주권적 주장은 유엔 멤버십을 전제로 한 입장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러나 북한을 상대로 한 평화공존이 선택의 대상이 아닌 주어진 조건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아무리 주장하더라도 현실적으로 커다란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어렵게 평화공존의 길이 열리고, 또 다시 대북한 관여 정책이 추진된다고 하더라도 미국 빅터 차 교수의 표현처럼 북한이 직면할 ‘개혁의 딜레마(reform dilemma)’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인데 즉, 변화와 성장으로 인한 북한 사회의 궁극적인 변화를 북한 지도부가 수용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변화하고 성장한 북한이 우리에게 협력적인 국가 정체성을 가질 수 있을까의 문제다.
1991년 이후 지금까지의 모든 플랜을 수정하고 다시 짠다는 생각에서 최고의 정교함이 필요한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