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기업들, 산업AI로 글로벌 선도 노려

2025-08-25 13:00:05 게재

독일 슈피겔 “소비자 중심 미국과 달리 산업 중심 유럽에 큰 기회”

독일 네카르줄름에 있는 아우디 공장은 거대한 기술적 발레 공연장 같다. 2500대의 로봇이 하루 1000대의 차체를 생산하며 용접·납땜·접착작업을 쉼 없이 수행한다. 눈에 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첨단산업 생산의 정점처럼 보인다. 하지만 아직 개선의 여지는 남아 있다.

아우디의 네카르줄름 공장에서 로봇이 차량을 조립하고 있다. 출처:아우디 홈페이지

한 지점에서 주황색 로봇 팔들이 차체 바닥에 작은 볼트를 용접한다. 카메라가 번쩍이며 사진을 찍고, 차체는 다음 공정으로 이동한다. 그 순간 흥미로운 일이 벌어진다. 컨베이어벨트 옆 회색 캐비닛 속 인공지능(AI) 프로그램이 이미지를 분석해 용접 로봇이 남긴 불꽃자국(스패터)을 찾아낸다. 이 흔적은 나중에 케이블을 손상시킬 수 있다. 지멘스 제어장치가 이 정보를 다음 공정으로 전달하면 용접 안경을 쓴 작업자가 20초 내 그 부분을 갈아내다.

사람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지만 AI 덕분에 간단해졌다. 제어장치는 조명을 켜서 작업자가 다듬어야 할 위치를 정확히 알려준다. 직원들은 수개월 동안 AI를 훈련시켜 무해한 얼룩과 위험한 스패터를 구분하도록 만들었다. 머지않아 이 갈아내는 작업조차 로봇이 맡게 될 것이다. AI 덕분에 아우디는 더 효율적으로 일한다. 동시에 1명의 일자리가 사라진다.

이달 중순 독일 시사주간지 ‘슈피겔’ 보도에 따르면 아우디는 100개에 달하는 AI 프로그램을 도입했거나 개발 중이다. 독일 전역에서 엔지니어, 소프트웨어 개발자, 관리자들이 효율성과 품질관리를 높이고, 유지보수를 개선하며, 기획과 제품개발 속도를 앞당기기 위해 AI를 활용하고 있다.

맥킨지 전략책임자 아수토쉬 파디는 “AI 응용은 전세계 산업을 혁신할 것”이라며 “대량생산은 더 효율적이고 정밀해지며 맞춤형 제품도 쉽게 제공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참여하지 않는 기업은 도태된다. 앞으로 3년이 결정적”이라며 “유럽 기업에 큰 기회가 열려 있다”고 덧붙였다.

유럽·독일의 기회와 도전

현재 AI의 주도권은 오픈AI와 구글, 메타 같은 미국 기업과 딥시크, 알리바바 같은 중국 기업이 가진 대규모언어모델(LLM)에 집중돼 있다. 이들은 주로 소비자 서비스에 치중한다. 반면 독일은 자동차·화학·제약·전자 등 다양한 제조업 기반과 노하우를 갖고 있다. 슈피겔은 “에너지 비용 상승, 트럼프 행정부의 15% 관세, 중국과의 경쟁, 유럽 내 갈등, 복잡한 규제라는 부담 속에서도 독일은 산업 AI에서 돌파구를 찾을 수 있다는 기대가 크다”고 전했다.

산업용 데이터는 인터넷에 떠돌지 않고 기업 내부에 쌓인다. 따라서 독일·유럽의 제조기업들이 이 데이터를 활용해 최고의 AI 응용도구를 만든다면 경쟁력을 회복하고 수출동력으로 삼을 수 있다는 계산이다.

지멘스와 슈나이더 일렉트릭(프랑스), ABB(스위스-스웨덴)는 이미 산업자동화의 세계적 선도기업이다. 지멘스의 자동화 도구는 전세계 공장의 약 1/3분을 제어한다. 이들은 여기에 AI를 얹어 차세대 산업 혁신을 추진 중이다.

아우디는 ‘엣지 클라우드(Edge Cloud for Protection)’라는 새로운 생산 데이터 클라우드를 실험 중이다. 과거에는 각 공정마다 소형 컴퓨터와 장치가 설치돼 있었지만 이제 데이터를 중앙 클라우드에 모아 관리한다. 이 방식은 유지보수·업데이트를 훨씬 빠르고 저렴하게 만들고 공정 전체를 AI가 분석·제어할 수 있게 한다.

아우디 데이터분석 책임자 세바스티안 라이나쉬는 “올가을부터는 A5, A6 세단 생산에 엣지 클라우드를 본격 도입될 예정이다. 그리고 점차 다른 공장에도 확대된다”고 말했다. 이는 AI를 개별 작업이 아닌, 전사적 규모로 활용하려는 전략의 일환이다.

지멘스 vs 보쉬, 서로 다른 접근

하지만 이는 엄청난 규모의 작업이며 사실상 대기업만 감당할 수 있다. 독일 전역에 분포한 중견기업들은 상대적으로 움직임이 더디다. 그렇다면 모든 기업이 바로 사용할 수 있는 ‘기성품 형태의 기반 모델’이 존재한다면 어떨까. GPT-4.1, 제미나이(Gemini), 라마(Llama)처럼 다양한 응용을 제공하지만 산업 현장의 필요에 맞게 개발된 모델 말이다.

지멘스 최고기술책임자(CTO) 페터 쾰테는 올해 5월 자사 주관 AI 서밋에서 “세계 최초의 산업용 기초 모델을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그는 기존 LLM이 텍스트와 음성, 이미지를 다루듯 산업 AI 모델은 설계도와 로봇 동작 데이터, 공급망 정보까지 처리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훈련에 필요한 방대한 데이터 확보가 과제다.

지멘스는 자사 공장과 개발 연구소에서 나오는 데이터를 활용한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방대한 AI 모델이 복잡한 작업을 수행하기에 턱없이 부족하다. 쾰테는 지멘스의 산업용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구입한 기존 고객사들에게 데이터를 공유하자고 설득하고 있다. 그 대가로 고객사들은 AI 기반 보조 도구 ‘인더스트리얼 코파일럿’ 같은 지멘스 AI 애플리케이션을 더 저렴하게 이용할 수 있다.

하지만 진행 속도는 더디다. 독일 내 30만개가 넘는 산업기업 중 데이터 공유에 동의한 곳은 고작 60곳뿐이다. 독일이 미국 중국과 경쟁하려면 턱없이 부족한 수치다.

그렇다면 산업용 기반 모델 개발이 과연 옳은 전략일까. 베를린 혁신네트워크 ‘KI Park’를 이끄는 사비나 예슈케는“단일한 산업용 기반 모델에 집중하기보다는 보다 전문적이고 유연한 모델들의 생태계를 만드는 것이 더 합리적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혁신속도가 워낙 빠른 만큼 결정적인 것은 ‘적응력’이라는 것이다.

이런 시각을 공유하는 기업이 보쉬다. 보쉬 최고디지털책임자(CDO) 탄야 뤼커트는 “단일 모델보다는 유연한 AI 에이전트 생태계가 중요하다”고 본다. 그는 AI 에이전트가 공정 제어와 문제 해결을 자율적으로 수행하면 산업에 스마트폰·인터넷 수준의 혁신이 올 것이라 전망했다.

예를 들어 기계가 고장나면 에이전트는 다른 보쉬 공장에서 동일한 문제가 있었는지 확인하고 매뉴얼을 참고하며 교대 기록을 살펴본 뒤 몇초 안에 가능한 해결책을 제안한다. 더 복잡한 작업의 경우에는 여러 개의 에이전트가 결합해 서로 소통하며 문제를 해결할 수도 있다. 뤼커트는 이러한 도구의 전면적인 활용이 개별 공장에 수백만유로의 절감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말한다. 또 고객사들은 자사 데이터를 활용할 수 있지만 지멘스 시스템과 달리 보쉬에 민감한 데이터를 공유할 필요는 없다.

독일 ‘어플라이드AI 연구소’에 따르면 현재 유럽에서 687개 이상의 산업 AI 스타트업이 활동중이다. 아우크스부르크 소재 ‘플러스텐(plus10)’ 같은 기업은 머신러닝 분석으로 기계 오류 원인을 실시간 파악해 불량률을 최소화한다. 프로이덴베르크, 베링거 인겔하임, 콘티넨탈 등 대형 제약사와 자동차 부품사들이 고객이다.

유럽의 딜레마, 의존과 독립 사이

현재 대부분의 독일·유럽 산업 AI 기업들은 마이크로소프트, 아마존, 구글 클라우드, 엔비디아 칩 등 미국 빅테크 인프라에 의존한다. 하지만 슈나이더 일렉트릭의 디지털 책임자 피터 베크세서는 “고개를 떨굴 필요는 없다. 의존은 상호적”이라고 지적했다. 엔비디아는 대부분의 칩을 대만 TSMC에서 생산하는데, TSMC는 네덜란드 ASML의 장비를 필요로 하며, ASML은 다시 트럼프(Trumpf)의 레이저나 자이스(Zeiss)의 광학기술 같은 독일의 기술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또 메타의 라마처럼 오픈소스로 제공되는 AI 프로그램은 사실상 ‘원자재’와 다름없다고 지적한다. 중국 딥시크의 급부상은 시장이 얼마나 빠르게 움직이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프랑스 미스트랄(Mistral) 같은 유럽의 기반모델도 큰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유럽연합(EU)은 ‘AI 선도 대륙’을 목표로 초대형 데이터센터 건설을 추진 중이다. 하지만 투자주체와 수익모델이 불투명해 기업들의 회의론도 크다. 전문가들은 초대형 프로젝트보다는, 기업 인근에 분산된 데이터센터가 실질적 효과가 크다고 말한다.

EU는 이미 100억유로를 지원한 데 이어 추가로 200억유로 펀드 조성을 계획중이다. 기업들은 AI 관련 규제법이 발목을 잡을 수 있다고 우려한다. 보쉬의 뤼커트는 “유럽은 산업 AI에서 명확한 경쟁우위를 갖고 있지만, 규제로 스스로 발목을 잡으면 승자가 될 수 없다”고 경고했다.

유럽 기업들은 산업 AI라는 신무기를 통해 다시 글로벌 산업 리더십을 노리고 있다. 방대한 산업 데이터와 제조 역량이라는 강점을 갖고 있지만, 미국 빅테크의 압도적 자본·컴퓨팅 파워와 중국의 빠른 추격 속에서 선택과 집중이 절실하다.

슈피겔은 “결국 이 싸움은 외부가 아니라, 규제·투자·생태계 정비 등 유럽 내부의 의지와 실행력에 달렸다”며 “유럽을 이길 수 있는 건 유럽 자신뿐”이라고 강조했다.

김은광 기자 powerttp@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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