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치행정 발목 잡는 ‘정부 사전협의제’
지자체 자율·창의적 정책 걸림돌 작용
정부, 중복·과잉사업 예산낭비 막아야
정부 사전협의제가 지방정부 자치 행정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25일 내일신문 취재에 따르면 최근 서울 한 자치구는 2018년부터 실시해온 어르신 대상포진 무료접종을 축소해야 하는 입장에 처했다. 해당 지자체는 2018년 기초생활수급자를 대상으로 무료접종을 시작했고 2023년에는 65세 이상 전 주민으로 대상을 확대했다. 올해 접종 종류를 늘려 더 많은 어르신을 보호하려 했지만 보건복지부는 확대는 물론 기존 지원 사업까지 재협의가 필요하다고 선을 그었다. 지자체가 운영 중이던 필수 예방사업에 제동이 걸린 것이다.
난감한 것은 이 자치구만이 아니다. 해당 지자체의 접종사업에 대한 주민 호응이 크다고 판단해 동일하게 도입하려던 지자체들 모두 복지부 승인을 거쳐야 하게 됐다. 한번 통과된 사업이지만 신청 주체가 다를 경우 매번 같은 절차를 거쳐 승인을 받아야 하는 불합리한 일이 반복되고 있는 셈이다. 자치구 관계자들은 “기존 사업까지 재협의를 거치면 그나마 하던 것까지 축소될 가능성이 높다”며 “주민 복지를 위한 적극행정이 위축될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명확하지 않은 이유로 지자체의 신사업 신청을 계속 반려하는 경우도 있다. 한 자치구는 발달장애인 배상책임보험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수차례 ‘반려’ 통보를 받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중앙부처 자체적으로 비슷한 보험을 출시했고 그 이후에야 승인이 떨어졌다. 구 관계자는 “정부에서 만든 보험과 구 보험은 대상과 보장 범위가 다른 별개의 사업”이라며 “중앙 정부 사업이 나오기 전에 지자체에서 비슷한 것이 나오려 하자 출시를 지연 시킨 것 아니냐는 의구심이 들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광역단체도 마찬가지 신세 = 광역 지자체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전국 17개 시·도는 복지제도를 만들거나 바꿀 때마다 중앙정부 눈치를 살펴야 한다. 사전협의를 통과하지 못하면 정책 도입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국비가 전혀 투입되지 않는 경우에도 사전협의는 필수다. 최근 서울시는 권역별 도서관 신설을 추진 중인데 이마저도 정부의 ‘승인’을 거쳐야 한다는 것이다. 중앙정부 허락없인 문화시설인 도서관 하나도 마음대로 짓지 못하는 셈이다.
사전협의제의 순기능을 강조하는 의견도 있다. 사전협의제는 예산이 투입되는 지자체 사업 전반에 걸쳐 적용되지만 특히 복지부와 연관된 사업이 문제가 되는 경우가 많다. 현행법은 현금성 사회보장제도를 신설 또는 변경할 경우 사회보장기본법 26조 2항에 따라 복지부장관과 사전협의를 거쳐 예산을 요구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중앙부처 또는 지자체 사이 유사 중복사업을 사전에 방지하려는 취지다. 예산절차와 연계함으로써 사회보장사업의 신설과 변경 필요성, 유사 사업간 중복여부를 효과적으로 점검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다. 지자체들이 복지사업을 남발하지 않도록 견제하는 장치로 활용돼 왔다.
하지만 지자체들 사이에선 시대가 변했고 지자체의 자치 역량이 신장된 만큼 재량권과 자율성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복지분야 관계자는 “기존 사전협의제는 지방정부의 자정 능력이 부족하다는 전제 하에 설계된 제도” 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하지만 현재 지자체장은 주민들 투표로 뽑히는 선출직인데다 심각한 문제가 있다면 주민소환제도 등을 통해 중간에 직을 내려놓게 만들 수 있다”며 “지자체의 창의적 정책실험과 선의의 경쟁이 가능하도록 제도에 변화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제형 기자 brother@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