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병억의 영국 톺아보기
대학 위기에 뒷짐 진 영국
“정부가 외국인 유학생의 등록금에 세금을 부과하면 대학 경쟁력이 훼손될 것이다”영국의 집권 노동당 정부는 지난달 외국인 유학생 등록금의 6%를 세금으로 징수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대학교육 관계자들은 가뜩이나 어려운 대학 재정에 부담을 더하며 유학생 유치전에서도 불리한 조치라며 강력하게 반발했다. 그러나 써야 할 돈은 늘어나지만 낮은 경제성장률에 직면한 정부는 밀어붙일 태세다. 구조적 위기에 직면한 대학에 정부의 정책은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다.
영국대학의 학기는 9월에 시작한다. 2025~2026 학년도의 경우 영국인 학부생들은 9535파운드, 약 1763만원 정도를 수업료로 지불한다. 반면에 외국인 유학생은 학교와 문이과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평균 3만파운드가 넘는다. 영국 학부생들의 등록금은 2017년 후 8년 만에 처음으로 285파운드가 올랐다.
지난 8년 간의 물가상승률을 감안하면 연간 최소 2000파운드 정도씩은 인상됐어야 대학 재정이 안정될 수 있다고 고등 교육 전문가들이 줄기차게 요구했다. 하지만 저성장에 대학등록금 인상이 가계에 주는 부담이 크고 선거에서 표를 의식한 정치인들은 이런 요구를 묵살해 왔다.
일부 의원들이 무상 고등교육을 주장해왔던 노동당이 지난해 7월 초 정권교체에 성공한 후 등록금을 인상했다는 것은 그만큼 대학 재정이 어렵다는 말이다.
잉글랜드 동북부에 있는 더럼대학교는 최근 200명의 직원을 해고한다고 발표했다. 영국에는 165개의 공식 인가를 받은 대학교가 있다. 이 가운데 옥스브리지, 런던정경대, 에딘버러대, 더럼대 등 24개 학교는 러셀그룹(Russell Group)에 속한다.
연구중심의 상위권 대학들이 이 그룹을 결성해 서로 협력한다. 따라서 러셀그룹에 속한 더럼의 직원 해고 소식은 대학 사회에 큰 충격을 안겨줬다. 다른 대학교들도 올해 초부터 교직원 일부를 해고하기 시작했다.
외국인 학생 등록금에 세금 징수 계획
이런 상황에서 정부는 외국인 대학생들이 납부하는 등록금의 6%를 세금으로 걷겠다는 계획이다. 이 세금이 도입되면 영국 대학교에 연간 6억2100만 파운드, 약 1조 5000억여원의 재정 손실이 발생한다고 싱크탱크 고등교육정책연구소는 추산했다.
걷히는 세금은 대학교가 아니라 내국인의 직업교육비로 지출된다. 외국인 학생의 비율이 높은 러셀그룹 소속의 대학교가 이 세금 징수로 손실이 크다. 런던소재 유니버시티컬리지런던(UCL)은 연간 4200만파운드, 맨체스터대학교는 연간 2700만파운드 정도 손실이 예상된다.
2024~2025 학년도 영국대학교의 45.2%가 재정적자를 기록했다. 전 학년도와 견줘 15.6%p 늘었다. 정부가 대학을 더 지원해줘야 하는데 세금 징수로 재정을 더 어렵게 한다.
이는 영국 유학을 고려중인 외국인 학생들의 결정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재정이 어려운 영국 대학이 자국 학생 등록금을 인상했기에 외국인 유학생 수업료도 추가로 올릴 가능성이 높다.
자국 학생 등록금은 연간 최대 상한액이 있지만 외국인 학생은 그렇지 않다. 외국인 유학생에 대한 세금 징수로 각 대학은 재정이 어려워져 유학생에게 주는 장학금 등을 삭감할 것으로 보인다.
고등교육정책연구소의 마크 포더길 연구원은 “영국대학의 등록금 10파운드 가운데 4.5파운드는 외국학생이 납부한다”며 “영국 대학 연간 수익의 20%에 기여하는 외국인 학생에 세금을 부과하는 것은 대학 경쟁력을 크게 떨어트릴 수 있다”고 우려했다.
구조적 위기에 직면한 영국대학
영국 대학이 이처럼 재정 위기를 겪게 된 것은 그동안의 여러 정책이 누적됐기 때문이다. 지난 8년간 등록금이 동결된 상황에서 대학은 재정난을 타개하려 외국인 학생 유치에 많은 돈을 지출했다.
일간지 파이낸셜타임스 보도에 따르면 더럼대학교의 경우 2015~2016 학년도 해외 유학생 유치 비용은 150만파운드에 불과했다. 2023~2024년에는 520만파운드로 3.46배나 급증했다. 자국 학생 1명이 입학하면 연간 2500파운드 손해를 본다.
그러나 유학생 1명을 유치하면 이런 손실을 보전하고도 남는다. 그렇기에 대학은 등록금이 동결된 속에서 외국인 학생 유치에 열중한다. 외국인 학생을 유치하려면 기숙사도 추가로 지어야 하고 대학평가에서도 상위 순위를 유지하기 위해 많이 투자해야 한다. 비용이 급증할 수밖에 없다.
재정이 어려워지니 영국 대학교의 순위도 하락세다. 지난 6월 중순 영국 글로벌 대학 평가 기관 QS(Quacquarelli Symonds)가 발표한 ‘2025 세계대학평가’에 따르면 러셀그룹에 소속된 24개 학교의 절반 정도가 지난해에 비해 순위가 떨어졌다. 에딘버러대학교가 전년도에 비해 7위 떨어진 34위로 최대 하락폭을 보였다. 평가기준에 포함된 자국 학생 대비 외국인 학생 비율이 영국 대학의 경우 하락했다.
재정의 악화와 외국인 학생 비율 하락이 대학교 순위를 끌어내렸다. QS의 제시카 터너 최고경영자는 “영국 대학들이 유유자적할 여유가 없다. 해외 명문대학들과 경쟁하려면 투자를 늘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럼에도 정부는 외국인 학생 유치를 어렵게 만드는 정책을 잇따라 이행중이다. 영국에서 공부한 외국 국적의 학부생과 대학원생은 졸업 후 비자없이 직장을 구하거나 취직해 2년 간 일할 수 있었다. 박사학위 취득자는 3년이다. 지난해 초 보수당 정부는 이를 6개월 단축하려 했으나 기업이나 학교의 반발이 워낙 커서 시행하지 못했다.
그런데 노동당 정부는 체류 기간을 18개월로 다시 줄이려 한다. 숙련 근로자가 부족한데 이민을 줄이겠다는 공약에 매몰돼 모순된 정책을 추진중이다.
2024년 4월 보수당 정부는 숙련 근로자 비자 발급 요건을 연봉 2만6200파운드(약 4850만원)에서 3만8700파운드(약 7160만원)로 올렸다. 자국인 채용을 우선하라는 조치다. 노동당은 집권 후 1년 1개월이 지났지만 이 요건을 그대로 유지중이다.
이처럼 다양한 비자규제 강화로 외국인 유학생의 대학 지원율이 2025년 1월 전년도에 비해 13% 하락했다. 2024년에도 전년도에 비해 44%나 줄었기에 하락 추세가 계속된다. 전체 공인 대학교의 90% 넘는 150개 대학교가 지난해 세운 유학생 충원 목표에 미달했다.
대학생들의 경제적 어려움 가중돼
대학의 구조적 어려움은 학생들에게도 고스란히 피해가 간다. 영국인 학부생들의 경우 2024~2025 학년도 중에 68%가 학기중에 알바를 한 것으로 조사됐다. 2021~2022 학년도에 이 비중은 34%에 불과했다. 물가가 급등하는데 장학금 등은 줄었기 때문이다. 2014~2015 학년도의 경우 학기중 숙소비로 쓰는 돈이 등록금의 절반에 불과했다. 그러나 지난해 말을 기준으로 숙소비와 등록금 지출이 거의 같아졌다.
대학을 졸업해도 원하는 직업을 갖고 만족할 만한 급여를 받기가 쉽지 않기에 대학 진학률이 점차 하락중이다. 2022년에 45%에 달했던 진학률은 이후 점차 하락해 2025년에 42%에 불과했다.
이처럼 구조적 위기에 처한 고등교육의 틀을 다시 짜야 하지만 정부의 대처는 매우 부족하다. 영국대학교육협의회의 비비엔 스턴 최고경영자는 "대학교들이 재정적 압박에 대처하기 위해 고군분투중이다. 장기적이고 영속적인 대학 재정지원을 정부와 논의하고 합의해야 순위 하락을 막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캐나다와 호주 등 영어권의 다른 대학들은 정부가 앞장서 고등교육에 투자한다”며 “순위 하락이 불가피한 것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노동당 정부가 취임 전 준비한 주요 리스크 목록에 자금난에 따른 대학교 파산 우려가 있었다. 노동당은 오히려 대학의 바람과 반대로 가고 있어 이래저래 대학의 어려움은 가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