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국가주도 혁신모델의 빛과 그림자
다양한 신기술 분야 선도하는 인상적 성과 … 지나친 내부경쟁, 과도한 비용투입 부작용도
대부분의 스타트업은 투자자 신뢰를 얻기까지 시간이 걸린다. 위험한 기술을 맡길 수 있을 만큼 인정받으려면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중국 안후이성 성도 허페이시의 한 핵연구소에서 2년 전 분사한 중국 기업 ‘퓨전에너지테크(Fusion Energy Tech)’는 예외적인 경우에 속한다. 이 기업은 지난 7월 태양보다 훨씬 더 뜨거운 반응을 일으키는 원자핵 융합에서 파생된 플라스마 기술을 상용화하겠다고 발표했다.
지난달 24일 신화통신에 따르면 퓨전에너지테크는 ‘연소 플라즈마 실험용 초전도 토카막(BEST)’을 건설중이다. 사상 최초로 핵융합을 통한 전력생산이 가능하다는 점을 입증한다는 목표를 내세웠다. BEST는 허페이 연구기관에서 가동중인 ‘실험용 첨단 초전도 토카막(EAST)’의 업그레이드 버전으로, 2027년 완공이 예상된다.
퓨전에너지테크는 국유자본이 과반지분을 보유하고 있으며 등기자본금은 145억위안(약 2조8000억원)에 달한다. 중국 자동차 제조사 니오(NIO)도 주요 주주 중 하나다. 이 기업 엔지니어들은 BEST 프로젝트를 기반으로 ‘핵융합 공학 실증로(Engineering Demonstration Reactor)’를 구축할 계획이다. 상업운전은 2040년대 가능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이 기업이 관련 기술을 활용해 개발한 보안검색장치도 현지 지하철역에 속속 설치되고 있다. 출퇴근길 시민들은 매일 그 장치를 지나친다.
이처럼 중국정부는 신기술 부문에서 서구를 앞지르는 데 전념하고 있다. 중국 기업들은 전기차(EV)와 리튬배터리 분야를 장악했고 휴머노이드 로봇 같은 신흥분야에서도 빠르게 선두로 치고 나가고 있다.
영국 이코노미스트지 최신호는 “중국의 기술역량은 국가 연구소와 대학에서 나온 아이디어를 상용화하는 ‘혁신 컨베이어벨트’ 덕이 크다”며 “정부 정책문서에서 흔히 ‘혁신사슬’로 불리는 이 과정은 여러 분야에서 빠른 진전을 이끌었다”고 분석했다.
아이디어 상용화하는 ‘혁신사슬’
중국의 혁신사슬은 대개 연구비 보조금으로 시작된다. 연구자들은 국가의 지원을 받는 연구소에 자리잡고, 여기에서 유망 아이디어를 골라내는 관료들이 연구팀의 창업을 돕는다. 많은 경우 지방의 개발구(개발특구)에서 일이 진행된다. 이 과정을 통해 최근 수혜를 본 사례가 테세우스(Theseus)다.
충칭에 있는 이 회사는 컴퓨터비전센서를 만든다. 2019년만 해도 시안의 국영 광학·정밀기계연구소 출신 과학자 몇명이 찻집에 모여 자신의 연구를 어떻게 상업화할지 논의하던 모임 수준이었다. 해당 기술을 중심으로 공급망을 키우고 싶었던 충칭시 산하 구 정부가 자금을 댔고 2020년 산업단지에서 정식으로 법인을 세우도록 도왔다. 지난해 테세우스는 해당 분야의 선도업체로 발돋움했다. 전국적 명성을 가진 과학자들을 영입했고 중국 최대 통신사인 국유기업 차이나모바일과 협력했다. 테세우스는 올해 5월 그래픽을 더 부드럽게 구현하는 아몰레드 디스플레이를 새로 개발했다고 발표했다.
국가가 지원하는 연구소와 대학 등 연구기관들은 다른 방식으로도 혁신의 상업화를 확대하고 있다. 일부는 자신들의 특허를 기업이 직접 입찰 해 살 수 있는 마켓플레이스를 만들었다. 대표적으로 헤이룽장성 하얼빈의 농업과학원은 자체개발한 유전자변형(GM) 대두 특허를 최근 경매에 부쳤다. 이런 경우 연구기관은 기술을 산 기업이 제대로 활용할 수 있도록 기술인력을 파견하기도 한다.
연구기관과 민간기업 간 유대 강화를 가늠할 수 있는 지표는, 연구기관이 아이디어를 기업에 판매하거나 공동 개발·자문을 제공해 거둬들이는 수입이다. 가장 최신 통계인 2019~2023년 해당 수입은 2배 가까이 증가한 2050억위안(약 40조원)에 달했다.
협업의 효익은 양방향으로 흐른다. 독일의 중국 전문 싱크탱크인 ‘메르카토르중국연구소(MERICS)’의 과학·기술·혁신 프로그램 책임자 예룬 흐로네베헌-라우는 “바이오테크 분야에서 국가 연구자들이 민간의 자원을 동원해 연구를 진척시키고 있다”고 말했다. 예컨대 대학 연구자들이 지역 기업의 산업용 발효시설을 활용해 박테리아를 배양하는 식이다.
허페이시, 민·관 연결하는 인터페이스
허페이는 국가주도로 과학계와 산업계가 결합하는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도시다. 허페이 시정부는 민간기업에 투자하고 이들 기업 인근에 공급망을 구축한다. 즉 연구소·대학·민간 사이의 인터페이스 역할을 하는 것이다. 퓨전에너지테크는 수많은 성공사례 중 하나다. 허페이에서 개발된 플라즈마-융합 암 치료법은 임상시험 단계에 들어섰다. 허페이에서 개발된 양자보안 이동통신 서비스는 이미 시판중이다.
허페이 시정부는 특히 시장 메커니즘만으로는 해결이 어려운 ‘기술병목’을 뚫는 데 집중하고 있다. 대표적 사례로 중국 양자산업계는 그동안 특정 극저온 ‘희석 냉동기(dilution refrigerator)’를 소수 해외 공급업체에 의존했지만, 현재는 허페이시 주도로 국산화를 진행시키고 있다.
중국 중앙정부는 이런 최적의 협업 시스템을 추려 전국적으로 확산시키고 있다. 안후이성 당서기를 지낸 정산제 주임이 이끄는 국가발전개혁위원회(NDRC·발개위)는 올해 3월부터 기술 투자용 1조위안(약 195조원) 규모의 기금을 직접 운용하고 있다. 베이징 소재 컨설팅업체 ‘후퉁 리서치’에 따르면 중국 산업·인터넷기술부(MIIT)도 산업단지 내 아이디어의 상업화 총괄에 나섰다. 지난 4월에는 내륙의 두 도시를 그린에너지 허브로 탈바꿈시킨 공로를 인정 받은 리러청이 MIIT 수장에 임명됐다. 이는 중국정부가 혁신사업의 전환을 더 많이 진전시키겠다는 신호로 해석됐다.
기업들로선 중국 전반에서 벌어지는 폭넓은 혁신이 신산업 진입장벽을 낮춘다는 게 큰 장점이다. 미국 프린스턴대학 연구원이자 중국 산업정책 전문가인 카일 챈은 “그 덕분에 기업들이 새로운 시장에 손쉽게 뛰어들 수 있다”고 말했다. 대표적 사례로 원래 스마트폰 제조사였던 샤오미는 약 3년 만에 중국에서 성공적인 전기차 사업을 구축할 수 있었다. 이같은 동력은 신산업 탄생도 촉진하고 있다. 중국이 플라잉 택시(eVTOL·전기 수직이착륙 항공기)라는 태동기 산업에서 선도국이 된 배경에는 EV와 드론 기술역량을 모두 활용했다는 점이 있다.
혁신이 과열경쟁 이끌기도
하지만 국가주도 모델에 투입되는 비용도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이 방식이 막대한 자원배분 실패를 초래해 중국 경제성장을 짓누르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머지않아 지속가능하지 않게 될 우려도 크다.
이코노미스트지는 “중국 국내총생산(GDP)의 최대 2%가 어떤 형태로든 산업 보조금에 투입되는 것으로 추산된다”며 “국가가 강력하게 혁신을 주도하면서 민간의 벤처투자는 붕괴했다”고 지적했다. 컨설팅기업 KPMG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중국 민간의 벤처투자액은 전년 동기 대비 41% 급감했다.
막대한 국가지원의 성과도 점점 불투명해지고 있다. 자본과 노동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쓰는지를 가늠하는 총요소생산성(TFP)은 정체상태다. 전문 클러스터를 만들겠다는 지방정부의 몇몇 사업은 실패했다. 중국 남부 난닝의 전기차 공급망 육성 계획이 대표적인 실패 사례다.
보조금은 많은 산업에서 심각한 과잉설비를 낳았다. 대부분의 중국 전기차 업체가 적자다. 너무 많은 기업이 같은 고객을 놓고 다투는 승자 없는 과열 경쟁, 이른바 ‘인벌루션(involution)’ 상태가 벌어졌다. 중국 사회에서 ‘내권화(內卷化)’로 회자되는 이 용어는 내부로 쏠리는 과도한 경쟁과 발전의 악순환을 뜻한다.
한편 해외시장을 노리는 전략도 각국의 견제로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게다가 시장수요가 불확실한 기술이 양산되고 있다. 휴머노이드 로봇 분야 종사자들은 ‘유사한 제품을 쏟아내는 회사가 너무 많지만 실제 수요는 미미하다’고 하소연한다.
국가 주도형 혁신은 세계적 수준의 기업을 여럿 만들어냈지만 투자 대비 수익률이 지속가능성을 담보할 만큼 높지 않을 수 있다. 미국 싱크탱크 로듐그룹 대니얼 로즌은 “중국이 혁신자금 조달로 떠안은 부채가 방대해 지속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지난해 지방정부 융자플랫폼(LGFV) 부채를 포함한 공공부채는 GDP의 124%에 달했다.
이코노미스트지는 “결국 중국정부는 신기술에 대한 정부 지원 강도를 낮출 수밖에 없는 상황에 몰릴지 모른다”며 “그 시점이 오면 중국의 ‘혁신 컨베이어벨트’가 멈춰설 수도 있다”고 전했다.
김은광 기자 powerttp@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