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시론
트럼프의 물가 끌어내리기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었던 방법으로 미국의 물가를 잡으려고 하고 있다. 덕분에 9월에는 연준이 기준금리를 내릴 것이란 전망이 점점 힘을 얻고 있다. 제롬 파월 미국 연방준비제도(연준) 의장은 8월 22일 잭슨홀 심포지엄에서 “실업률과 기타 노동시장 지표의 안정성을 고려하면 정책기조 변경을 신중히 검토할 수 있다”는 발언을 했다. 시카고 상품거래소(CME) 선물시장은 9월에 기준금리가 0.25%p 인하될 확률을 9월 1일 기준 87.4%로 반영했다.
트럼프가 취할 수 있는 쉬운 방법은 ‘조보닝(Jawboning)’이다. 정부의 강력한 구두권고를 의미한다. 그 대표적인 사례로 지난 5월 월마트가 관세로 인한 가격인상 가능성을 언급한 적이 있다. 이에 트럼프는 “관세를 핑계로 소비자에게 부담을 넘기지 말고 관세를 삼켜라(EAT THE TARIFFS)”라고 월마트를 압박했다. 미국에서 국가가 개입해서 물가를 강제로 끌어내렸던 사례는 2차세계대전 끝난 이후 한번도 없었다.
국가가 개입해 물가를 강제로 끌어내려
기업들에 대한 압박은 월마트로 끝나지 않았다. 심지어 아마존 인텔 애플 등에 대해서도 트럼프의 강력한 권고는 계속됐다. 미국의 소매업체들은 트럼프의 눈치를 보면서 가격인상을 최대한 뒤로 미루고 있다. 트럼프가 조보닝을 강화하는 이유는 올해 연말까지 기업들의 가격인상을 어떻게든 막으려는 데 있다. 미국인한테 가장 중요한 쇼핑기간은 11월 블랙프라이데이~크리스마스 시즌이기 때문이다.
트럼프는 제약회사에 약값을 내리라는 최후통첩까지 했다. 7월 31일에 17개 주요 제약회사 CEO에게 공동서한을 발송했다. 앞으로 60일 안에 즉 9월 29일까지 약값을 대폭 내리라는 내용이다. 만약 이를 거부하면 관세와 정부 조달 제한, 반독점 조사 등의 수단을 동원하겠다는 협박도 서슴지 않았다.
미국은 시장우선주의를 계속 강조해 온 나라다. 그런데 트럼프가 시장을 무시하고 정부가 강제로 약값을 인하시키는 수법을 쓰고 있다. 마치 사회주의 시장경제 중국 같다는 착각을 일으킬 정도다. 아스트라제네카 GSK 등 제약회사들은 약값을 내리거나 정부와 협상 중에 있다. 미국의 약값이 너무 비싼 측면이 있지만 제약 산업의 혁신 원동력이기도 하다. 정부가 가격을 규제하면 단기적으로는 가격을 낮추는 효과가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R&D 투자 등이 감소해 혁신이 둔화될 수 있다.
트럼프가 심혈을 기울이는 것은 유가 떨어뜨리기다. 7월 미국의 물가상승률은 전년 대비 2.7%다. 전체 물가지표가 시장의 우려보다 낮게 나온 것은 전년 대비 9.5%나 떨어진 휘발유 가격 때문이다. 유가를 하락시킨 건 트럼프 혼자만의 힘이 아니다. 사우디아라비아 빈살만과의 공조가 있었기 때문이다. 국제유가가 70달러를 넘어갔을 때 그는 네 번이나 원유를 증산했다. 그래서 지금 유가가 65달러를 넘나들고 있다.
빈살만이 낮은 유가를 유도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셰일오일의 생산단가는 원래 48달러였다. 트럼프가 강철에 대해서 50% 관세를 부과하면서 셰일오일 생산의 중심지인 텍사스주 서부 퍼미언 분지(Permian Basin)의 생산단가가 65달러로 올랐다. 그래서 빈살만은 유가를 70달러 아래로 유지해서 미국 셰일오일 업체들의 신규 유전개발을 불가능하게 할 의도를 갖고 있었다. 기존의 유전들도 유지보수에 비용이 증가하면 미국의 셰일오일 생산량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사우디는 원유를 팔아서 복지재정을 충당하는데 국제유가가 65달러 이하로 떨어지면 재정적자가 큰 폭으로 늘어난다. 빈살만 입장에서 국제유가가 65달러 이하로 계속 유지되는 것은 큰 부담이 아닐 수 없다. 미국의 셰일오일 업체들이 생산량을 줄이게 되면 그때부터 빈살만이 본 게임을 시작할 것이다.
물가는 표에 직결, 에너지공급 가장 싼 가격으로
트럼프는 선거공약집 ‘어젠다47’에서 미국 국민에게 세계에서 가장 싼 가격으로 에너지를 공급하겠다고 했다. 그런 트럼프가 빈살만의 의도를 모를 리 없다. 트럼프는 러시아를 휴전시켜 러시아산 원유가 국제무대에서 빨리 팔리길 원한다. 이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리되면 빈살만이 원유를 감산하더라도 국제유가가 떨어질 수 있다.
최근 트럼프는 “우리는 원자력 발전소를 증설하고 있다”고 발언해 유가를 장중 63.15달러까지 끌어내리기도 했다. 현재 트럼프는 미국의 집값 상승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국가비상사태까지 검토 중이다. 물가는 표에 직결될 수 있다. 트럼프는 물가잡도리를 내년 하반기까지 지속할 것이다. 내년 11월 중간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다.
박진범 재정금융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