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로
‘대통령 담론’의 허구
한국에서는 대통령이 국민에 의해 선출됐으므로 전체 국민을 아우르고 통합을 모색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한다. 그런데 이러한 원칙론적인 얘기는 기실 공허하다. 대통령은 특정 정당의 추천을 받아 그 정당을 지지하거나 대통령 후보의 공약을 선택한 유권자들에 의해 권력의 정점에 오른다. 정권을 창출한 정당과 대통령은 고위 공직자나 공공기관의 인사권을 행사하고 정책을 수립하며 집행함으로써 집권세력이 된다. 이를 떠받드는 구조가 이른바 당·정·청이다.
문제는 대통령이 국민의 일반의지를 표상하는 존재로서 정치적 발언을 삼가야 한다는 암묵적 합의 같은 게 존재한다는 것이다. 대통령이 ‘당무에 개입하면 안된다’는 원칙과도 닿아 있기도 하다.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이라는 법적 의무에 기인하는 명제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명제는 허구다. 대통령은 공무원이지만 선출직 공직자로서 정당의 공천을 받아서 당선된 정치인이다. 일반 공무원이나 전문 관료들이 임명직 인사라는 사실과 근본적 차이가 있다. 민주적 정당성을 담지한 공무원으로서의 대통령은 정치와 행정을 동시에 떠맡지만 결정적 순간에 특정 성향의 국민들만 대변할 수도 있다. 정책으로 인한 수혜자가 있는 반면 그렇지 않은 층도 있기 마련이다. 정치와 정책은 궁극적으로 가치중립적일 수 없는 가치판단이 개입되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거대담론만 애기해야 한다는 프레임의 문제
현대정치는 정당정치이고 대통령은 정당의 지도자다. 2002년 총재직이 폐지되고 당권과 대권이 분리됐지만 여전히 대통령은 후보 이전의 시기엔 당의 대표이고 당을 상징하는 기표이기도 하다. 그런데 대통령이 되는 순간 모든 국민을 대표한다는 지극히 이론적이고 상징적인 틀에 묶어두려는 시도는 반정치적이다. 대통령의 언어는 숭고해야 하고, 거대담론만을 얘기해야 한다는 프레임에 가두려는 시도 역시 음모적이다. 보수·진보를 막론하고 역대 대통령들이 무능했던 것은 대통령이 절대군주 시대에나 있을 법한 군림하는 자리로 착각했기 때문이다. 정당은 'party'로서 부분(part)을 대표한다.
현대정당에서 이념의 차이가 좁혀지면서 포괄정당(catch all party)의 형태(독일 출신 정치학자 키르히하이머의 개념) 지향성을 보이는 걸 부인할 수 없지만, 정당의 지지자에는 분명한 차이가 존재한다.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이 모두 정당의 이념 스펙트럼 상 보수 정당이라고 하지만 특정 이슈에서는 엄밀한 차별성을 보이는 걸 무시할 수 없다.
대통령은 엄존하는 진영 대결에서 특정 유권자의 지지를 받아 당선됐으므로 논쟁적 이슈에서 분명한 정책과 정치 지향을 밝히는게 도리에 합당하다. 물론 과도하게 진영 대결을 촉발하는 언어를 삼가야 하는 것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대통령은 가장 강력한 이슈 설정자이어야 한다. 예민한 문제에서 발언을 회피하거나 두루뭉술하게 넘어가는 것이 통합이라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이런 관점에서 최근 이재명 대통령의 활발한 SNS 정치를 야당이 문제 삼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논쟁적 이슈를 제기하면서 만약 밝힌 견해에 오류가 있다면 공론화 과정을 통해 제기된 새로운 사실을 인정하고 정책으로 채택하는 절차를 밟아가면 될 일이다.
이재명 대통령은 역대 대통령들이 정치인이 아닌 것처럼 행동하면서 의제 설정에서 무기력한 모습을 보인 행태와는 다른 길을 가고 있다. 이 대통령이 내란을 극복하고 국민의 선택에 의해 국정의 최고권력에 오른 만큼 분명하고 강력하게 의제를 제시하고, 장관이나 일반 공무원, 학계나 언론에 의해서 제기되지 않은 문제들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건 올바른 방향이다. 만기친람이니, 너무 디테일한 걸 지적한다는 비판에 구애받아선 안된다. 야당은 이 대통령의 모든 걸 부정하는 행태에 익숙해 있기 때문이다. 디테일한 국민의 삶의 말초신경에 속하는 문제도 지적하는 것이 민생에 부합하는 길이다.
대통령을 ‘행정인’으로 가두려 해서는 안돼
'정치인’ 대통령을 ‘행정인’ 대통령으로 가두려 해서는 안된다. 공공개혁, 국회개혁의 거대담론도 대통령이 주도할 때 탄력을 받을 수 있다. 민주적 정당성에 의해 선출된 이 대통령은 절차적·실질적 측면에서 더욱 강력해져야 한다. 대통령은 정치인이어야 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