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믿고 금리 내리겠다는 케빈 워시
90년대 앨런 그린스펀처럼 생산성에 베팅 … 연준 조기 금리인하 신호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차기 미국 연방준비제도(Fed) 의장으로 지명한 케빈 워시 전 연준 이사가 인공지능(AI)이 미국 경제의 생산성을 크게 끌어올릴 것이라며, 물가 자극 없이 금리를 낮출 수 있다는 구상을 내놓았다. 1990년대 앨런 그린스펀 전 의장이 생산성 개선을 근거로 긴축을 미뤘던 판단을 되풀이하겠다는 의미다.
파이낸셜타임스(FT) 5일(현지시간) 보도에 따르면 워시는 AI를 “우리 생애 과거·현재·미래를 통틀어 가장 생산성을 끌어올리는 물결”로 규정했다. 생산성이 크게 높아지면 물가 상승 압력 없이도 기준금리를 내릴 수 있다는 판단이다.
워시는 지난해 12월 아벤파이낸셜 최고경영자 사디 칸과의 인터뷰에서 1990년대 그린스펀 전 의장의 결정을 거론했다. 그는 “그린스펀은 기업과 시장 현장에서 들려오는 정성적 신호(anecdotes)와 다소 난해한 데이터에 근거해 금리를 올릴 필요가 없다고 믿었다”며 “그 결과 경제는 더 강해졌고 물가는 더 안정됐다”고 말했다.
트럼프 행정부 인사들도 비슷한 시각을 보인다. 스콧 베센트 재무장관은 CNBC 인터뷰에서 “우리는 1990년대와 유사한 생산성 붐의 초기 단계에 있다”고 말하며, 그린스펀 전기를 읽어보라고 언급했다. 그는 당시 그린스펀이 경제를 ‘과열 상태로 운용’한 판단이 옳았다고 평가했다.
FT는 그린스펀의 결정적 순간으로 1996년 9월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를 지목했다. 당시 그린스펀은 공식 통계보다 생산성이 더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금리 인상을 미뤄야 한다고 설득했다. 당시 샌프란시스코 연은 총재였던 재닛 옐런 전 연준 의장은 FT에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생산성 이야기를 했고 많은 이들이 확신하지 못했다”면서도 “결과적으로 그는 완전히 옳았다”고 말했다.
현재 연준 지도부도 AI의 잠재력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제롬 파월 의장은 1월 “기술은 결국 생산성을 높이고 임금 상승의 기반이 된다”고 말했고, 리사 쿡 연준 이사도 “AI가 생산성을 크게 끌어올릴 수 있다는 증거가 늘고 있다”고 밝혔다. 과거 연준 고위 인사였던 빈센트 라인하트 BNY인베스트먼트 이코노미스트는 AI가 장기적으로 생산성을 높이고 물가를 낮출 ‘설득력 있는 방향성’을 갖고 있다고 평가했다.
다만 회의적인 시각도 적지 않다. 라인하트는 “기대 산출 경로를 끌어올리는 효과는 분명하지만, 지금 당장 생산성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고 보긴 어렵다”고 경고했다. 시카고대 부스경영대학원의 아닐 카샤프 교수도 “지금은 지출만 늘고 생산성 효과는 미뤄진다면 물가에 압력이 생길 수 있다”고 말했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대런 아세모글루 등은 “경제 이론이나 데이터가 낙관론을 뒷받침하지 않는다”고 반박한다.
워시는 AI가 1년 안에 ‘상상하기 어려운 변화’를 만들어낼 것이라고 전망한다. 스탠퍼드대 후버연구소에서 AI 산업을 가까이서 지켜봤고, 사모펀드 투자 경험을 통해 기술 기업의 변화를 이해하고 있다는 평가도 받는다. 그의 멘토인 스탠리 드러켄밀러는 “실리콘밸리 네트워크와 AI 확산 속도를 모두 아는 인물”이라고 말했다.
상원이 인준할 경우 워시는 5월 중순 취임해 곧바로 시험대에 오른다. 현재 3.5~3.75%인 기준금리를 빠르게 낮추라는 정치적 압박 속에서, AI가 실제로 생산성을 끌어올리고 물가를 누르고 있는지 데이터를 통해 입증해야 한다는 과제가 남아 있다.
양현승 기자 hsyang@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