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시민을 공동 설계자로, 통합돌봄의 출발점
내년 3월 시행을 앞둔 ‘돌봄통합지원법’논의가 한창이다. 그러나 법과 제도만으로는 통합돌봄이 작동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공공은 시민의 참여와 아이디어를 단순한 의견 수렴이 아닌 정책 설계의 출발점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시민의 제안은 민원이 아니라 설계도이며, 정책의 속도와 품질을 높이는 실질적 자원이다.
무엇보다 ‘참여와 공동설계’가 필요한 이유는 돌봄이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의 경험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제도 설계자가 놓치기 쉬운 돌봄의 빈틈인 밤중의 위급 상황, 장거리 이동, 돌봄자(케어러)의 소진 등은 당사자와 시민의 경험 속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다시 말해 시민참여는 장식이 아니라 품질관리 장치다.
둘째, 돌봄을 비용이 아닌 ‘투자’, 시혜가 아닌 ‘권리’로 전환하기 위해서도 공동설계가 필요하다. 조안 트론토가 말했듯 돌봄은 “세계를 유지·지속·수선하는 활동”이다. 그러나 경쟁과 효율 논리에 밀려 돌봄은 주변화돼 왔다. 시민이 설계 단계부터 참여할 때, 돌봄을 사회적 권리이자 공동체의 핵심 인프라로 재정의하는 사회적 합의가 가능하다.
시민 참여는 장식 아닌 품질관리 장치
셋째, 당사자 주권을 존중하기 위해서도 시민참여는 필수다. 일본에서는 치매 정책을 만들 때 ‘참여기획’을 적용하여 환자와 가족이 직접 방향을 정한다. 최근 일본 인지증 본인 워킹그룹이 시민 900명과 함께 정책을 제안한 사례는 “당사자 없는 결정은 없다”는 원칙이 제도적으로 가능함을 보여준다. 이는 한국에서도 통합돌봄 설계의 중요한 준칙이 돼야 한다.
넷째, 지역사회와 사회연대경제 주체의 참여가 결합되어야 통합돌봄은 지속가능하다. 돌봄은 국가가 독점할 수 없으며, 지역에서 함께 만들어가는 공동 책임이다. 협동조합·사회적기업·마을기업 등은 주민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돌봄의 빈틈을 메워왔다.
공공이 이들의 실행력을 제도와 자원으로 뒷받침할 때, 통합돌봄은 현장에서 속도와 지속가능성을 동시에 얻는다. 즉, 통합돌봄은 시민참여와 사회연대경제가 결합할 때 비로소 작동하는 구조다.
다섯째, 이러한 참여는 이미 시작되고 있다. 돌봄리빙랩네트워크는 150여명의 시민, 전문가, 행정이 함께 현장에서 문제를 실험하고 해법을 찾아가는 장이다. 또한 사회연대경제돌봄포럼은 협동조합과 사회적기업, 시민단체가 모여 돌봄을 공공과 함께 설계하기 위한 제안들을 내놓고 있다.
이 열린 공론장과의 협력은 제도 설계 단계에서부터 반드시 연결돼야 한다. 그래야 정책이 책상 위의 문서에 머무르지 않고, 현장의 실행력과 결합된 살아 있는 돌봄으로 작동한다. 이러한 과정을 제도화하는 방법론으로 ‘리빙랩’을 제안한다.
통합돌봄 정책은 회의실이 아니라 현장에서 완성된다. 성과와 실패를 투명하게 공유하며 학습하는 행정이 가능할 때 비로소 혁신이 만들어진다. ‘100인 돌봄 시민회의’처럼 주민 스스로 문제를 정의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공론장이 전국 곳곳에서 일상화되어야 한다.
당사자가 설계·추진·평가에 참여해야
통합돌봄의 성패는 시민을 ‘대상’이 아닌 ‘공동 설계자’로 대우하는가에 달려 있다. 공공이 먼저 문을 열고 시민과 지역사회가 함께 설계도를 그릴 때, “집에서, 동네에서, 나답게” 살 권리가 현실이 된다. 지금이 전환의 창이다. 시민이 제안하고 공공이 연결하며 사회연대경제가 뒷받침할 때, 돌봄은 혁신이 된다. 지금, 함께 시작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