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에 타인 개인정보 제출 “위법 아냐”
동대표, 입주자 584명 정보 법원에 제출
1·2심은 유죄 … 대법, 파기 “정당행위”
재판과정에서 타인의 개인정보가 포함된 자료를 법원에 제출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아파트 동대표에 대해 대법원이 무죄 취지로 판단했다. 법원에 자료를 제출하는 행위는 정당행위로 인정돼 위법성이 조각될 수 있다는 취지다.
대법원 1부(주심 노태악 대법관)는 개인정보보호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아파트 동대표 A씨의 상고심에서 유죄를 인정한 원심을 파기하고 무죄 취지로 사건을 대전지방법원으로 돌려보냈다고 5일 밝혔다.
A씨는 대전의 한 아파트 동대표 회장으로, 2020년 6월 입주자대표회의 회장 및 동대표 직무집행정지 가처분 사건과 관련해 입주자들의 동의 없이 관리사무소 보관 중인 입주자카드 584장을 법원에 증거로 제출했다.
입주자카드에는 세대주 성명, 직업, 차량번호, 가족사항, 세대원 생년월일, 전화번호, 주소 등의 개인정보가 기재돼 있었다. A씨는 관리소장과 공모해 정보주체의 동의 없이 개인정보를 제3자에게 제공하고 업무상 알게 된 개인정보를 누설한 혐의로 기소됐다.
1심은 A씨에게 벌금 70만원을 선고했다. 1심 재판부는 개인정보보호법 제18조 제2항 제8호의 ‘법원의 재판업무 수행을 위하여 필요한 경우’는 공공기관에만 적용된다고 판단했다.
또한 A씨가 민사소송법에 따른 ‘문서송부의 촉탁’ 등 적법한 절차를 거치지 않고 관련 없는 개인정보까지 포함된 입주자카드를 그대로 제출했다는 점을 지적했다. 재판부는 법률자문을 받았다는 사정만으론 범의나 위법성 인식이 없다고 볼 수 없다고 판시했다.
2심은 1심과 같이 유죄를 인정하되 벌금 70만원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했다. 2심 재판부는 개인정보보호법 제18조 제2항 제8호가 공공기관으로 적용 범위를 한정한 것이 평등권이나 재판받을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공공기관은 개인정보를 제3자에게 제공할 경우 이를 공개해야 하는 의무가 있어 무분별한 제공을 방지하는 장치가 있다는 점을 근거로 들었다. 또한 공공기관 외 개인정보처리자도 다른 법률의 특별한 규정이 있으면 개인정보 제공이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대법원의 판단은 달랐다. 대법원은 “재판과정에서 소송상 필요한 주장의 증명이나 범죄혐의에 대한 방어권 행사를 위해 개인정보가 포함된 자료를 법원에 제출하는 경우 사회상규에 위배되지 않는 행위로 위법성이 조각될 수 있다”고 판시했다.
정당행위 해당 여부는 △개인정보 수집·보유 경위 및 목적 △제출 상대방 △목적 달성에 필요한 최소한 정보 제출 여부 △비실명화 등 안전성 확보 조치 가능성 △제출 개인정보의 내용과 성질 △정보주체의 법익 침해 정도 △다른 수단이나 방식의 존재 여부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객관적이고 합리적으로 판단해야 한다고 기준을 제시했다.
구체적으로 이 사건에서는 △입주자카드가 가처분 사건의 핵심 쟁점인 정족수 충족 여부를 판단하는 데 필요한 자료였고 △재판부가 2주일 내 제출을 명했는데 그 기간 내 개별 동의를 받기 어려웠으며 △주민등록번호 뒷자리를 삭제하는 등 일부 보호조치를 취했고 △민감정보가 포함되지 않았다는 점 등을 고려했다.
대법원은 “피고인이 담당 재판부에 입주자카드를 제출한 것이 정당행위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본 원심의 판단에는 정당행위에 관한 법리를 오해하여 판결에 영향을 미친 잘못이 있다”며 파기환송 이유를 설명했다.
그동안 법원의 제출명령 절차나 수사기관의 영장 등을 거치거나 비식별화 처리를 하지 않고 임의로 개인정보를 제출했다고 하여 이를 모두 개인정보보호법 위반죄로 처벌할 것인지가 문제되어 왔다. 대법원은 이런 행위가 정당행위에 해당할 수 있다는 점과 그 요건을 명시적으로 밝혔다.
김선일 기자 sikim@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