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남방정책 1.0의 대안, ‘한-미-아세안’ 삼각협력
관세·안보·산업전환 세가지 파고 함께 넘을 파트너 … 아세안은 생산기지이자 소비시장
한국은 이번 한미정상회담의 성과를 ‘대아세안 협력 업그레이드’의 마중물로 삼아 ‘한-미-아세안 삼각협력‘을 그려 볼 수 있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아세안 각국도 관세·안보·산업전환이라는 세 가지 파고를 함께 넘어야하기 때문이다. 지난 8월 초 미국은 상호관세 행정명령을 통해 한국(15%)과 아세안 회원국(인도네시아 19%, 베트남 20%, 태국 19%, 필리핀 19% 등)의 대미 관세율을 발표했다. 또한 미국은 ‘우회 수출 및 환적’ 상품에 대해서는 40%의 고율관세를 부과하겠다고 밝혔다.
한편 8월 말, 미 상무부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인텔의 미국 내 팹에 적용되던 VEU(검증된 최종사용자) 지위 철회를 발표했다. 120일 유예 후 개별 라이선스 체제로 전환되며, ‘현상 유지’는 허용하되 고도화와 증설은 제약될 가능성이 크다. 이는 첨단 공급망을 북미 지역에 집중하는 대신에 비(非)북미 지역과는 분절하는 조치로 보인다. 비북미 지역인 아세안 지역과 북미 지역을 연결함으로써 미국의 규제로 추가적인 공급망 재편 과제를 짊어진 우리 기업을 지원할 방법을 찾아야 할 때다.
아세안, 고부가가치 산업 전환중
아세안은 ‘중국+1’ 전략 추진의 최전선이다. 다수의 미국 기업도 공급망 리스크를 분산하고 중국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생산기지를 이전하고 있고, 그 주요 대상이 아세안 지역이기 때문이다. 2023년 아세안으로의 외국인 직접투자(FDI)는 사상 최고치인 2300억달러에 도달하며, 글로벌 FDI가 둔화 및 정체하는 가운데에도 반등한 점은 상대적으로 아세안 지역의 경제적 매력도와 회복 탄력성을 보여준다. 다만 대아세안 전체 FDI의 약 70%를 싱가포르가 흡수했고, 인도네시아와 베트남이 그 뒤를 잇는 전형적인 ‘허브&스포크형’으로 이루어졌다.
아세안 지역은 중산층이 빠르게 확대되고 있고 젊은 인구의 비중이 높아 소비시장 및 생산기지로서 큰 잠재력을 보유한다. 낮은 생산비와 확장되는 내수, 젊은 인구 구조는 제조와 소비를 동시에 충족할 수 있는 시장을 제공한다. 또한 최근 들어서는 아세안 지역의 산업 지형도 의류와 신발 등 노동집약적인 산업에서 고부가가치 제품 생산으로 변화하고 있다. 말레이시아 페낭과 베트남 북부 지역을 중심으로 반도체 후공정 업체들이 클러스터를 확대 중이다. 앰코 테크놀로지(Amkor)는 베트남 박닌성에 16억 달러를 투자해 첨단 패키징 설비를 확충했고, 말레이시아의 전기·전자 산업에는 2021년~23년 3년간 2,627억 링깃이 투자되었는데, 이중 97.6%는 외국인직접투자(FDI)였다.
전기차(EV) 가치사슬도 아세안 각국의 지원으로 빠르게 형성되고 있다.
태국 투자청(BOI)은 자동차 제조업체가 생산 요건을 더욱 쉽게 충족하고 수출을 늘릴 수 있도록 전기 자동차 인센티브 정책을 조정했다. 2022년 발표한 전기차 정책에 따르면 2024년까지는 자동차 제조업체의 국내 전기차 생산량이 수입량과 동일하면 면세수입을 허용했다. 2025년에는 수입량 1대당 국산 전기차 생산량을 1.5대로 늘리는 조건으로 면세 수입을 허용하여 규제를 강화하듯 보이지만, 태국에서 생산해서 수출되는 전기차도 생산목표치에 포함되도록 변경함으로써 비야디(BYD)와 그레이트월모터스 등 중국 기업들로부터 40억 달러 이상의 투자 유치와 중국계 OEM 업체들의 현지화 경쟁을 가져왔다. 인도네시아는 니켈 가공과 정련, 2차 전지 전구체 및 양극재 글로벌가치사슬과 연결되고 있다.
실현가능한 한-미-아세안 삼각협력
한미정상회담에서 합의된 에너지 협력 성과를 토대로 한국은 에너지 안보를 북미 조달로 보강하고, 이를 다시 아세안 전력·산업 전환 프로젝트에 적용한다면 ‘한-미-아세안 삼각협력’을 구체화할 수 있다.
트럼프 행정부는 우회수출 차단과 국내 일자리 및 수출 확대에 최우선의 관심을 두므로, 삼각협력을 통해 한국은 우회 수출을 실효적으로 차단하는 방안을 제안하고, 미국 산업에 이익이 된다는 점을 강조한다면 ‘한-미-아세안 삼각협력’은 실현 가능성이 있다.
먼저, 한국과 미국이 함께 아세안에 파일럿 형식으로 ‘투명한 원산지·통관추적 시스템’ 사업을 제안할 수 있다. 트럼프 행정부는 상호관세를 부과하면서 환적과 우회 수출에 대해 고율의 페널티를 부과하겠다고 밝혔다. 원산지 관련 단속 비용을 낮추고 집행의 효율성 개선이 가능하므로 미국이 거부하지 않을 것이다.
둘째, 삼각협력은 생산 재배치의 안전한 우회로가 되어 한국과 미국의 공급망 리스크를 낮출 수 있다. 실례로 미 상무부의 VEU 지위 철회로 인해 중국 내 반도체 칩 생산 설비의 증설 및 고도화가 제약된 삼성, SK하이닉스는 생산라인의 재배치를 고려하는 것으로 보인다.
셋째, 2024년 2월에 발효된 IPEF 공급망 협정에 따라 공급망위원회와 조기경보시스템을 작동 중이므로, 한-미-아세안 간 실무 연계가 가능하다.
마지막으로 미국과 아세안 양자관계와 한국과 아세안 양자관계는 현재 모두 최상위 단계인 포괄적 전략동반자 관계이므로 삼각 협력에 용이하다.
협력의 세축 : 에너지전환·역량·클린 코리도
‘한-미-아세안 삼각협력’을 △에너지 전환, △기술역량 지원, △클린 코리도(clean corridor)라는 세 축을 중심으로 설계할 수 있다.
첫째, 삼각협력을 통해 아세안 지역의 에너지전환을 촉진할 수 있고, 이는 한국과 미국의 대아세안 동반수출 확대로 이어질 것이다. 지난 한미 정상회담을 통해 한국과 미국은 원전 및 에너지 협력을 심화하기로 하였다. 원전 설계 원천기술을 보유한 미국과 시공 및 기자재 공급에 특화된 한국이 결합하면, 국제 원전 무대에서 시너지를 창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대형원전뿐 아니라 향후 시장 확대가 예상되는 차세대 소형모듈원자로(SMR)와 연료주기·안전표준, 그리고 송배전 디지털화 솔루션을 결합하여 맞춤형 ‘아세안 전력개발 패키지’를 형성하여 제안할 수 있다.
이 패키지는 베트남,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의 에너지전환 수요를 충족하여 수출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특히 미국 국제개발금융공사(DFC)와 한국수출입은행, K-Sure 등이 협조융자를 통해 지원하고, 운전·정비·규제 역량과 관련한 인력양성 프로그램을 함께 제공한다면, 중국과 러시아의 경쟁력을 넘어설 수 있다고 확신한다.
둘째, 아세안 각국의 중간재 생산 역량 확대를 위해 한국과 미국이 함께 지원할 수 있다. 아세안 각국의 산업 공급망은 고질적으로 중간재를 자체적으로 생산 및 조달할 역량이 부족하다. 이는 충분한 기술력을 보유한 인력이 부족하기 때문인데, 한국 주도로 산학협력기술대학 및 안전 관련 인증센터를 현지에 설립하고, 한미 공동 표준을 채택하여 부품 현지화율을 제고한다면 중간재 조달이 원활해질 것이다. 이에 더하여, 관세 및 조달 유인 체계를 아세안 각국이 수립 및 제공하여 중간재 현지 생산율을 높인다면 더욱 빠르게 현지 조달 비중이 상승할 것이다. 특히 한국의 표준 및 교육에 기반하여 제품 품질을 끌어올릴 수 있다면, 중국산 저가 제품의 공세에 품질과 납기, 서비스 등 비가격 경쟁력으로 맞설 수 있다.
셋째, 원산지·통관을 투명하게 입증하는 ‘클린 코리도어(clean corridor)’를 한국과 미국, 아세안이 함께 구축한다면 양 지역 기업은 더욱 원활하게 북미시장에 진입할 수 있다. 미중 패권경쟁의 심화는 한국과 미국, 아세안 일부 국가로 탈중국기업의 재배치를 촉진할 전망이다. 이 경우, 첨단산업 부문의 장비·소재·공정 관련 지식재산권의 ‘허용 가능한 이동 경로’에 대한 한미 간 조율 강도는 향후 더욱 강해질 것이다.
더 나아가 고관세·수출통제·원산지 검증이 한 묶음으로 작동하는 상황에서, 한국과 미국이 신뢰할 수 있는 원산지 관리시스템을 마련하여 아세안 핵심국에 시범 적용할 수 있다면, 북미 시장 진입의 용이성을 높이고 장비 및 기술이전의 허용범위가 투명해질 것이다. 이를 통해 결국 기업의 투자 및 이전 판단이 빨라지는 효과를 부수적으로 기대할 수 있다.
한미정상회담 성과를 아세안으로 연결하자
사실 ‘외교 이벤트’를 ‘경제성과’로 전환하기는 매우 어렵다. 한미정상회담의 성과를 아세안으로 연결하여 ‘한-미-아세안 삼각협력’을 추진할 수 있다면, 미국과 아세안 사이의 신뢰 형성에 기여함으로써 양 지역에 대한 정책 조율력과 대아세안 외교 레버리지를 확대할 수 있다.
한편 생산기지이자 소비시장인 아세안으로부터 공급망 안정성과 수출 다변화, 그리고 수출 확대로 인한 양질의 일자리 창출이라는 실질적 성과를 거둘 수 있다. 이는 한-아세안 양자관계에만 집중한 나머지, 미국, 일본, 호주, 중국 등 주요국과의 협력 연계에 한계를 보였던 신남방정책 1.0의 대안적 모델이 될 수 있다.
우리나라가 일본, 호주, 중국 등과 개발도상국을 연결하여 유사한 협력 모델을 형성할 수 있다면, 국제사회의 분절화 문제 해결에 기여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