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의 눈
사법부의 자성과 성찰이 먼저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파면된 직후 조희대 대법원장이 한덕수 전 국무총리, 정상명 전 검찰총장 등과 만나 이재명 대통령의 공직선거법 사건 처리를 논의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자 대법원이 17일 입장문을 냈다. “대법원장은 이 대통령 사건과 관련해 한 전 총리와는 물론이고 외부의 누구와도 논의한 바가 없으며, 거론된 나머지 사람들과도 제기되고 있는 의혹과 같은 대화 또는 만남을 가진 적이 없음을 명백히 밝힌다”고 했다.
강하게 부인했지만 읽기에 따라선 한 전 총리와 만나기는 했다는 것인지 애매한 구석이 없지 않다. 한 전 총리를 비롯해 거론된 인물들과 만난 적이 없고 따라서 이 대통령 사건을 논의한 적도 없다고 똑 부러지게 밝혔다면 좋았을 텐데 말이다.
제기된 의혹처럼 사법부 수장이 총리를 만나 ‘이재명 사건이 대법원에 올라오면 대법원에서 알아서 처리한다’는 말을 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여당 뿐 아니라 적지 않은 국민들이 여전히 사법부를 의심의 눈초리로 보고 있는 게 사실이다.
이 대통령의 선거법 위반 사건에 대한 대법원의 판결은 이례적으로 빨랐다. 대법원은 지난 4월 22일 사건을 소부에 배당한 당일 전원합의체에 회부하고 곧바로 심리를 진행했다. 통상 합의기일 10일전까지 사건을 지정하는 것과 달랐다. 대법원의 판결은 2심 무죄 판단을 뒤집는 것으로 검토해야할 내용이 많았을 텐데도 전원합의체 회부 이후 선고가 내려지기까지는 단 9일이 걸렸다. 유례를 찾기 힘든 속전속결이었다.
반면 나경원 국민의힘 의원 등의 국회선진화법 위반 사건은 1심이 나오는 데에만 5년이 훌쩍 넘어 선다. 지난 15일 검찰은 2019년 4월 ‘국회 패스트트랙 충돌’ 당시 채이배 의원을 의원실에 감금하거나 국회의안과 등을 점거한 혐의를 받는 나 의원 등 자유한국당(현 국민의힘) 지도부와 의원들에게 실형을 구형했다. 선고는 11월 20일로 잡혔다. 사건이 발생한지 6년 7개월, 재판이 시작된 지 5년 10개월만이다. 20대 국회에서 벌어진 사건에 대한 1심 판결이 21대 국회를 지나 22대 국회 중반 가까이 돼서야 나오는 셈이다. 법원 판결의 이런 극단적 불균형을 보고도 사법부를 신뢰한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 아닐까.
최근 여당 주도로 사법개혁이 속도감 있게 추진되자 법원 내에서는 사법부의 독립성 훼손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전국법원장들은 지난 12일 임시회의를 열고 “사법부의 참여”를 주장하기도 했다. 사법개혁 논의에 사법부가 참여하겠다는 건 이해가 가는 요구다. 다만 성찰이 먼저다. 왜 국민의 신뢰를 잃고 개혁의 대상이 됐는지 자성이 없다면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모습으로 비춰질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