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억년 진화의 비밀이 ‘소프트로봇’ 혁명을 이끈다
재료 하나로 지방부터 연골까지
생체조직 특성 모방한 기술 개발
자연이 수억 년에 걸쳐 완성한 ‘최적화된 설계’를 인간이 구현해낼 수 있을까. 하루가 다르게 각종 첨단 기술들이 쏟아져 나오는 시대다. 인공지능 로봇공학 등 과거에는 상상할 수 없는 기술들이 현실화한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기술이 발달할수록 과학자들은 오히려 자연에 대한 탐구를 더 깊게 한다. 자연의 한계를 뛰어넘는 기술을 추구하지만 자연은 여전히 가장 뛰어난 교과서다.
22일 국제학술지 ‘사이언티픽 리포츠(Scientific Reports)’의 논문 ‘자연환경에서 문어 팔 유연성이 복잡한 행동을 가능하게 한다(Octopus arm flexibility facilitates complex behaviors in diverse natural environments)’에 따르면, 문어의 8개 팔은 각각 12가지 서로 다른 동작을 할 수 있고 이는 4가지 기본 변형(단축 신장 굽힘 비틀림)의 조합으로 이뤄진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특히 앞쪽 팔(1, 2번)뒤쪽 팔(3, 4번)보다 더 많은 동작을 수행하는 기능적 분화도 확인됐다. 이는 카리브해 5곳과 스페인 1곳에서 25마리 문어를 관찰해 팔동작 3907회를 분석한 결과다.
물론 ‘갑자기 웬 문어?’라며 의아해 할 수 있다. 하지만 문어는 소프트로봇 분야에서 중요한 생물이다. 문어 팔은 생물학적 구조 중 가장 유연한 것 중 하나다. 단일 팔에서 여러 동작이 동시에 일어나고 여러 팔이 서로 다른 동작을 동시에 할 수 있는 복잡한 팔 협응을 보여준다.
소프트로봇은 기존의 단단한 금속이나 플라스틱 대신 실리콘 등 부드러운 재료로 만든 로봇이다. 인간의 좁고 구불구불한 혈관 안을 따라 이동하는 수술용으로 쓰이는 등 기존 로봇이 할 수 없던 새로운 일들이 가능하게 한다. 하지만 단단하지만 때론 유연한 근육 활동 등 우리가 당연히 여기는 사항들을 인간이 구현해 내기란 의외로 쉽지 않다.
국제학술지 ‘사이언스 어드밴시즈(Science Advances)’의 논문 ‘생체모방 격자 로봇: 구조 설계로 구현하는 방향별 특성 제어(Lattice structure musculoskeletal robots: Harnessing programmable geometric topology and anisotropy)’는 25킬로파스칼(kPa)에서 300kPa까지 광범위한 강성 범위를 단일 재료로 구현할 수 있음을 실험적으로 입증했다. 강성은 힘을 가했을 때 변형되지 않는 힘의 정도다.
아주 간단히 설명하면 코끼리의 근골격 구조에서 영감을 얻은 로봇 기술을 선보인 것이다. 연구진은 4만개가 넘는 근육으로 이뤄진 유연한 코로 꽃잎을 다치지 않게 집으면서도, 동시에 거대한 몸을 지탱하는 강력한 다리를 가진 코끼리의 이중적 특성에 주목했다. ‘격자 구조’ 기술을 통해 단일 재료로 25킬로파스칼(kPa)에서 300kPa까지 광범위한 강성 범위를 구현했다. 이는 인간의 지방(1kPa)부터 연골(수십 kPa) 수준의 생체 조직 특성을 포괄하는 수준이다.
핵심은 두 가지 기본 격자 블록인 ‘BCC’와 ‘XCube’의 활용이다. BCC 블록은 모든 방향으로 균등하게 유연한 근육 같은 특성을, XCube 블록은 방향에 따라 다른 강성을 가진 뼈 같은 특성을 보인다. 연구진은 이를 통해 100만개 이상의 서로 다른 격자 조합이 가능하다고 밝혔다. 벌집처럼 구멍이 뚫린 3차원 구조의 배열과 밀도를 조절해 같은 재료로도 다양한 기계적 특성을 구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문어와 코끼리에서 배운 이 기술들은 아직 실험실 단계지만, 이미 소프트로봇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다. 이처럼 기술과 자연은 대립하는 존재가 아니다. 자연에서 배운 지혜로 더 나은 기술을 만들어가는 것. 어쩌면 진정한 혁신은 자연을 뛰어넘으려 할 때가 아니라, 자연과 함께 걸어갈 때 비로소 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
김아영 기자 aykim@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