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화' 안해 국가전산망 통째로 멈춰섰다

2025-09-29 13:00:03 게재

설비 갖추고도 재난발생 시 무용지물

전문가들 “설계·운영 전면 재점검해야”

국가정보자원관리원 대전센터 화재로 전국 행정망과 민원 서비스가 마비되면서 정부가 수년간 강조해온 ‘이중화 전산망’의 실체가 도마 위에 올랐다. 정부는 ‘주센터-백업센터’ 구조의 이중화 장치를 갖추었다고 밝혀왔지만, 이번 사고로 실제 재난 상황에서 이중화가 작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국정자원 화재로 국가전산망 먹통 나흘째 국가정보자원관리원(국정자원) 대전 본원 화재로 전산망 마비 사태가 나흘째 이어지는 29일 서울의 한 주민센터에서 시민들이 업무를 보고 있다. 연합뉴스

29일 내일신문 취재를 종합하면 이번 사고로 주민등록 등·초본 발급, 모바일 신분 확인, 우체국 금융거래 등 국민이 일상적으로 이용하는 민원 서비스가 일제히 중단됐다. 단순히 민원업무 뿐만 아니라 중앙부처와 지자체 전자행정 시스템도 차질을 빚었다. 정부가 공식 메일 하나를 보내지 못해 민간 서비스인 카카오톡 채팅방을 이용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전문가들은 이번 사태의 원인으로 △무정전 전원장치(UPS) 리튬이온 배터리 발화로 인한 전원 공급 중단 △광주 백업센터 즉시전환(핫스텐바이) 미구축 △공주 재해복구센터(DR센터) 미가동 △전환훈련 부족 등을 꼽는다. 특히 전원과 데이터 이중화가 ‘있다’는 것과 ‘작동한다’는 것이 다르다는 지적이다. 사실상 이중화 대책이 없었던 셈이다.

사고의 시작은 화재가 난 배터리실이다. 에너지 밀도가 높은 리튬이온 배터리가 좁은 공간에 집적돼 있어 발화 시 열폭주로 불길이 확산했다. 전원 공급라인도 완전히 물리적으로 분리되지 않아, 배터리 쪽에서 발생한 화재가 다른 전력공급 장치 작동까지 멈추게 했다. 특히 배터리와 서버 사이 간격이 고작 60~70㎝로 좁아 배터리 화재가 곧바로 시스템 장비에 곧바로 영향을 미친 셈이다. 소방당국의 화재 진압이 늦어진 이유와도 관련 있다. 소방당국은 화재 진압 과정에서 서브 손상을 우려해 다량을 물을 분사하지 못하고 열을 식히는 방식으로 소량의 물만 분사했다. 결국 화재 진압은 늦어졌고, 피해는 확대되고 장기화됐다.

최후 보루인 공주 재해복구 전용 데이터센터 가동이 늦어진 것도 문제로 지적된다. 정부가 재난사태에 대비해 구축하기로 한 공주 재해복구센터는 18년째 문을 열지 못하고 있다. 29일 국회예산정책처의 2024년 회계연도 결산(행정안전위원회) 보고서에 따르면 공주센터는 대전·광주·대구에 이은 네 번째 국정자원 센터로 기존 데이터센터와 달리 화생방 내진 전자기파(EMP)차폐 등의 특수시설을 갖추고 있다. 대전센터와 광주센터 기능이 비상사태로 인해 동시에 마비되더라도 행정업무의 연속성을 확보하고 중요 전산 자원을 보호하기 위해 계획한 시설이다.

2008년 정보보호 중기종합계획에 담겨 추진된 사업으로, 애초 2012년 센터 구축을 마칠 계획이었다. 하지만 정부는 타당성 재조사, 사업자 선정 유찰 등을 이유로 사업을 차일피일 미뤄오다 2019년에서야 착공했다. 이후 2023년 5월 센터 건물 신축공사는 마쳤지만, 2023년 11월 정부 행정 전산망 장애 사태가 발생하자 이번에는 시스템 설계를 바꾸겠다며 또 한 차례 개청 시기를 연기했다.

운영 책임자의 준비 부족이 문제라는 지적도 나온다. 이번 사태에서는 무엇보다 한쪽 센터가 멈추면 실시간 다른 센터로 기능이 전환하는 체계가 갖춰져 있지 않았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재난 상황을 대비한 훈련이 없었던 셈이다.

전문가들은 재난 모의훈련 의무화 등 개선 대책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아예 이중화 시스템이 자동으로 작동하는 체계를 맞춰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한 정보통신업계 관계자는 “이번 사태로 이중화 장치라는 설비가 실제 재난 때는 아무런 역할을 못 한다는 걸 여실히 보여줬다”며 “사실상 이중화 대책이 없었던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 관계자는 또 “핵심 시스템을 2개 이상으로 나눈다는 물리적 설계에서 한발 더 나아가 자동화 단계까지 운영체계를 바꿔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신일 기자 ddhn21@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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