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틈과 턱을 장벽으로 인식하는 상상, 새로운 삶을 여는 상상
“소규모 소매점 출입구에 설치된 턱이나 계단은 장애인으로 하여금 일상생활에서 비장애인과 동등하게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갖는 인격체로 생활할 수 없게 만드는 차별과 배제를 상징한다.” 2022다289051,차별구제청구 등 사건에 관한 전원합의체 선고(2024.12.19.)
작년 대법원에서 장애인 이동권에 대한 의미 있는 판결이 나왔다. 2008년 장애인차별금지법이 시행된 후 지금까지 장애인등편의증진법 시행령에 경사로와 같은 편의시설 설치 의무 규정이 개정되지 않은 것은 위법하고, 그 방치에는 국가의 책임이 있다는 것. 위 글은 판결문에 수록된 오경미, 신숙희 대법관의 보충의견 일부다.
판결 시점의 특수성 때문인지 여전한 무감각 때문인지 이 판결이 전국을 떠들썩하게 하지는 못했지만 지금 다시 읽어도 가슴 벅차다. 비장애인인 필자가 구청장 7년의 임기 중 꾸준히 투쟁하듯 사업을 벌여온 것 중 하나가 장애인 이동권의 확대였다. 이동권은 장애인이 다른 기본권을 온전히 누릴 수 있는 매개이기 때문이다.
불필요할뿐더러 장애인의 이동을 위험하게 하는 볼라드를 1000개나 제거하고, 458개소 횡단보도의 턱을 낮췄다. 100개소 이상의 장애인 화장실을 개선했다. 노원의 4개 산마다 무장애 산책로를 설치해 장애인들에게 자연과 함께하는 여가생활을 선사했다. 전국 최초의 장애인 친화미용실을 조성한 것은 커다란 이정표였다.
장애인 이동권 확대 사업 꾸준히 추진
이후에도 장애인 이동을 막는 턱을 찾아내려 애썼고, 장애인의 어려움을 들으려 질문도 많이 했다. 그 결과 서울 전체에 설치된 장애인 전동보장구 급속충전기의 10%가 노원에 집중되어 있다. 그럼에도 미처 연결하지 못했던 ‘턱’을 뒤늦게 발견하고 얼마 전 새로운 경사로를 놨다. 서울시 최초의 중증장애인 차량용 보조기기 지원사업이다. 휠체어도 있고 차도 있는데, 휠체어에서 차로 갈아타는 몇㎝의 틈이 장애인들과 보호자에게는 큰 시련이었다고 한다. 올해 첫 지원대상자로 선정된 장애인의 어머니가 나에게 손편지를 통해 “단순한 장비 지원이 아니라 다시 세상과 마주할 수 있는 문이 열린 것”이라고 했다. 출입금지 팻말이 없어도, 비장애인의 눈에 보이지 않는 ‘턱’과 ‘틈’은 엄연한 ‘장벽’이었다.
혹자는 인터넷의 발달로 경계도 문턱도 없는 세상에 이동권이 여전히 중요하냐고 묻는다. 판결문은 이렇게 답한다. “소매점에 대한 장애인 접근권의 문제는 쇼핑의 문제가 아니라 삶 그 자체의 문제이다. 비장애인은 점심시간에 우연히 친구를 만나 식당이나 커피숍을 가거나, 귀가하다 문득 생각이 나서 서점과 꽃집에 들르고, 갑자기 배가 아파 약국을 이용하거나 동네 의원에 가면서, 내가 그곳에 접근할 수 있는지 없는지 미리 걱정하지 않는다. 장애인의 일상생활 또한 그래야 한다. 계획된 쇼핑은 대형 할인점과 온라인으로 대체될 수 있지만 우연과 즉자성으로 이루어진 나날의 삶은 대체될 수 없기 때문이다.”
장애인 이동 막는 '틈과 턱' 더 찾아낼 것
필자는 장애인의 일상이 여전히 궁금하다. 지금껏 일궈놓은 경사로에 만족하기보다 아직 남아있는 틈과 턱을 찾아내기 위해서다. 인간의 존엄을 모두가 평등하게 누리도록 보장하기 위해서는 타인의 삶과 경험을 상상하고 공감하는 과정이 필수다. 아주 작은 턱도 장애인에게는 큰 장벽이라는 것, 그 턱이 경사로로 바뀌면 어떤 이들에게는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는 것에 더 많은 상상력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