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시평
신용의 위기, 신호가 소음이 될 때
경제학적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의 역량이나 신뢰도는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의 인적자본이다. 거래 상대방이 이 보이지 않는 가치를 즉각 파악하기 어렵기에 시장은 필연적으로 대리변수를 활용한다.
노동시장에서 기업이 지원자의 잠재력을 가늠하기 위해 대학 학점을 보는 것처럼, 금융시장에서는 은행이 차주의 상환 능력을 평가하기 위해 신용점수라는 대리변수를 사용한다. 이 지표들이 신호로서의 기능을 제대로 수행할 때, 시장은 정보의 비대칭성을 극복하고 효율적으로 작동한다. 하지만 최근 데이터는 이 신뢰의 척도가 흔들리고 있음을 시사한다.
통계에 따르면 신용점수 950점을 넘는 고신용자가 1200만명에 육박하지만 정작 이들은 은행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다. 주요 시중은행의 주택담보대출 평균 커트라인은 이미 950점을 넘어섰고, 인터넷은행에서는 970점대 차주마저 탈락하는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신뢰의 척도 흔들리는 금융시장 신용 인플레인가, 금융소외인가
경제학적으로 볼 때 대리변수에 잡음이 섞이면 정보 가치를 잃고, 시장은 리스크 회피를 위해 문을 닫아버리는 레몬마켓의 역설에 빠지게 된다. 심지어 최근엔 고신용자가 저신용자보다 더 높은 금리를 적용받는 금리 역전 현상까지 나타나며 가격 기구의 왜곡마저 심화되고 있다.
하지만 섣부른 결론을 내리기 전에 냉철한 실증적 진단이 선행되어야 한다. 막연한 심증이 아니라 데이터를 통해 현재의 고신용자 탈락 사태가 진짜 신용 인플레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외부 요인 때문인지를 규명해야 한다. 가장 확실한 방법은 데이터를 열어 현재 950점대 차주들의 실제 부도율이 과거와 유의미한 차이를 보이는지 시계열적으로 분석하는 것이다.
만약 데이터 분석 결과, 고득점자들의 부도율이 과거와 동일하게 낮다면 이는 신용 체계(대리변수) 자체는 건재하다는 방증이다. 이 경우의 문제는 과도한 부동산 대출 수요와 정부의 총량 규제가 맞물려 발생한 금융소외이다.
주목해야 할 점은 데이터가 가리키는 진단 결과가 금융소외이든 신용 인플레이든 이를 해결하기 위한 근본적인 처방은 결국 신용평가 체계의 이원화로 귀결된다는 사실이다. 만약 데이터가 신용 인플레를 가리킨다면, 무너진 시장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민간과 정책 영역의 분리가 필수적이다.
정책적 목적을 위해 민간 점수에 인위적으로 개입(기록 삭제 등)하는 관행을 지양해야 한다. 민간 평가는 철저히 부도 확률이라는 시장 논리에 맡겨 변별력을 복원하고, 정책적 지원은 별도의 트랙에서 다루어야 시장 기능이 정상화될 수 있다.
반대로 데이터가 금융소외를 가리키는 경우에도 이원화는 유효한 해법이다. 민간 기준으로는 대출이 어려운 소외 계층을 돕기 위해 존재하는 정책금융이 기존의 민간 신용점수 잣대를 그대로 쓴다면 모순이 발생한다.
민간 점수는 상환 능력을 따지는데, 정책금융은 지원 필요성과 재기 의지를 봐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금융소외 계층을 효과적으로 포용하기 위해서라도 민간 점수와는 차별화된 정책 특화 스코어링 모델이 필요하다.
해법은 민간과 정책 각자의 목적에 맞는 평가 체계 이원화
결국 해법은 제 자리를 찾아주는 것이다. 민간 신용평가는 오직 차주의 재무적 신뢰도와 리스크만을 정밀하게 측정하는 순수 시장 지표로 남겨두어야 한다. 동시에 정책금융은 성실한 상환 의지, 자활 계획, 미래 소득 흐름 등을 반영한 독자적인 평가 모델을 갖춰야 한다.
정부와 금융당국은 조속히 데이터를 통해 현상을 진단하고, 그 결과에 기반하여 민간과 정책이 각자의 목적에 맞게 작동하는 평가 체계 수립을 서두를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