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시론

TSMC와 AI 시대의 역설

2025-10-23 13:00:01 게재

인공지능(AI) 반도체 열풍 속에서 대만의 TSMC가 세계 기술질서를 압도하고 있다. 지난주 3분기 실적 발표를 앞두고 TSMC의 미국예탁주식(ADR)은 대만 본장 주가 대비 2002년 이후 최고 수준의 프리미엄으로 거래됐다. 엔비디아와 애플, 브로드컴 등 글로벌 빅테크가 의존하는 단 하나의 파운드리인 TSMC를 세계 투자자들은 대만해협의 긴장을 알면서도 산다. 위험보다 필요가 앞섰기 때문이다.

먼저 팩트를 보자. TSMC의 2025년 3분기 매출은 9899억대만달러(약 324억7000만달러, 46조원), 순이익은 4523억대만달러(약 148억달러, 21조원)다. 전년동기 대비 각각 30%, 39.1% 급증한 수치다. AI 데이터센터 증설과 고성능 칩 수요가 실적을 밀어 올렸다. 시장 예상치를 웃돈 ‘서프라이즈’였고, 이 흐름은 4분기 가이던스에도 투영될 가능성이 크다는 게 시장의 전망이다.

세계 투자자들, 대만해협 긴장에도 TSMC를 사는 까닭

TSMC의 ADR 프리미엄이 의미하는 바를 짚어볼 필요가 있다. ADR은 미국 투자자가 미국 시장에서 해외 기업 지분에 투자할 수 있도록 미국 예탁은행이 발행하는 증권이다. 본주(현지 주식)와 경제적 권리는 동일하지만 거래통화 시간대 유동성 투자자 기반이 다르기에 가격 차이가 발생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는 본주와 대체로 동일한 가격(패리티)을 유지하지만 수급 불균형, 정보 비대칭, 환헤지 수요 등이 겹치면 괴리가 커질 수 있다. TSMC의 경우 이 괴리가 이례적으로 커졌다. 7월에는 ADR이 현지 주식 대비 평균 24% 프리미엄으로 거래되며 2009년 이후 월간 기준 최고의 폭을 기록했다. 10월 중순에는 50일선 기준으로 2002년 이후 최고 프리미엄이라는 블룸버그 보도가 다시 나왔다. 단순한 지역 차익거래가 아니라 글로벌 투자자들이 TSMC의 가치를 새롭게 평가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 배경에는 AI 인프라 대전환이 있다. 초거대 모델 학습과 추론을 위한 고성능 컴퓨팅(HPC)-GPU 클러스터 증설은 데이터센터의 전력, 냉각, 네트워크 설계를 송두리째 바꾸고 있다.

그 핵심에는 선폭이 2나노미터(nm) 수준에 불과한 초미세 첨단 공정을 안정적으로 대량 생산할 수 있는 파운드리가 있다. TSMC는 이런 차세대 반도체 공정의 절대적 생산 능력을 확보한 유일한 기업으로, 연말부터 2nm 공정 양산에 들어갈 전망이다. 이러한 기술적 우위는 ‘대체 불가능성’을 낳고 그 위에 신뢰의 프리미엄이 쌓인다.

물론 우려는 남는다. 첫째, 지정학적 불안정이다. 대만해협 긴장은 상수이고 중국의 군사력·경제 규모는 대만을 압도한다. 그러나 중국 역시 첨단 칩·장비 생태계에서 대만과 서방에 상호의존하고 있다. 전면 충돌이 가져올 경제적 피해가 너무 크기 때문에 시장은 양측이 결국 자제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 판단한다.

둘째, 과열 논쟁이다. 빅테크의 AI 투자 속도가 실제 수요를 앞지르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있다. 하지만 AI는 학습과 추론을 넘어 데이터센터 밖의 현실 기기(스마트폰 차량 공장설비 등)로 확산되며 투자 구조가 바뀌고 있다. 향후 몇 년간은 데이터센터 네트워크 메모리까지 수요 파급이 이어질 공산이 크다. 즉 속도의 조정은 있어도 방향은 꺾이지 않는다는 게 현재의 컨센서스다.

글로벌 자본이 TSMC에 몰리는 현상은 시장이 위험을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회피 대신 관리를 선택하는 경제의 철학을 보여준다. 분산 투자, 멀티로케이션, 장기 공급계약, 공정 다변화 같은 리스크 관리 체계를 바탕으로, 시장은 ‘없어서는 안 되는’ 기업에 신뢰 프리미엄을 부여한다. TSMC의 ADR 프리미엄은 바로 그 가격표다. 자본은 기술 그 자체보다 지속적 실행능력, 품질 일관성, 생태계 조정능력에 더 높은 값을 매긴다.

기술 뿐 아니라 신뢰 뒷받침 할 때 경쟁력 생겨

한국에 주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기술력만으로는 부족하다. 파운드리·메모리·패키징·소재·장비를 잇는 공급망 신뢰, 고객사와의 공동 로드맵, 전력·입지·인허가를 뒷받침하는 제도적 신뢰가 합쳐질 때 ‘대체할 수 없는 경쟁력’이 완성된다. HBM·패키징·전력반도체 등 강점을 더 예리하게 다듬고 품질·납기·수율에서 예측 가능한 표준을 세워야 한다. 그래야 K-반도체는 ‘필요가 두려움을 이기는’ 프리미엄을 얻을 수 있다.

TSMC가 누리는 오늘의 지위는 AI 시대 가격 체계의 본질을 드러낸다. 공포가 아니라 필요의 강도가 가격을 결정한다. 한국이 배워야 할 것은 기술력보다 ‘필요로 되는 힘’이다. 세계가 우리를 필요로 할 때 시장은 신뢰의 프리미엄으로 답할 것이다.

김상범 국제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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