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설현장 내국인 일자리 붕괴, “적정임금제가 해법”
저가수주→임금삭감→불법고용 ‘악순환 고리’ … 미국·독일, 임금 하한선 제도화로 내국인 고용안정
건설현장에서 저가 수주 관행이 임금 삭감을 부르고 그 결과 비합법 고용 외국인 노동자로 대체되면서 내국인 일자리가 붕괴되는 비정상적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 게다가 다단계 하도급 심화, 노동강도 증가, 숙련도 저하, 품질·안전 위협, 청년층 진입 기피 등 총체적 위기를 맞고 있다. 건설업을 정상화하기 위해 ‘적정임금제’를 도입해 임금 하한선을 규제해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김주영 더불어민주당 의원(경기 김포갑)과 한국노총 전국섬유·유통·건설노동조합연맹은 22일 국회에서 ‘건설산업 고용위기 극복방안 정책토론회’를 열었다. 심규범 건설고용컨설팅 대표는 발제에서 “한국의 건설현장은 내국인 일자리가 무너지고 있다”며 “내국인 실업이 더욱 심각해진 이유는 건설경기 침체에도 있지만, 남아 있는 일자리마저 외국인이 너무 많이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건설근로자공제회에 따르면 2024년 기준 국내 건설현장에서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는 약 42만명으로, 이 중 불법고용으로 추정되는 인원은 24만명에 달한다.
반면 2025년 9월 경기 부천시의 ‘건설현장 고용현황 조사’에 따르면 골조공사에서 내국인 비율은 13.3%에 불과했다. 해당 조사는 올해 6~7월 건설노동자 100명 설문과 골조공사 분야 팀·반장 및 현장소장 등 12명 면담을 통해 진행됐다. 직종별 내국인 비율을 보면 철근공 9.2%, 형틀목공 14.0%, 해체공 20.0%였다. 특히 철근공의 경우 중국동포 이외의 외국인이 70.7%를 차지했다.
내·외국인 임금 수준을 보면 내국인 노동자는 하루 일당 21만5000원, 중국동포는 20만원, 중국동포 이외의 외국인은 16만8000원이었다. 특히 철근공의 경우 각각 22만3000원, 19만4000원, 16만6000원으로 격차가 더 컸다.
작업 속도보다는 도면 해독, 계단참·슬라브 짜기, 철근 배근·조립·결속 등 기능 능력을 기준으로 비교할 때, 내국인의 기능 수준을 100으로 보면 중국동포는 78.4, 중국동포 이외 외국인은 55.1 수준이었다.
심 대표는 “철근공이나 민간공사의 경우 외국인 비중과 비합법 고용 비중이 높게 나타난다”며 “외국인 노동자 비합법 고용의 증가는 임금 차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이며 이로 인해 품질과 안전 수준, 채산성이 낮아질 가능성이 크다”고 설명했다.
이어 “외국인 노동자의 채산성 지수가 낮음에도 고용이 많은 이유는 다단계 도급 과정에서 노무비가 삭감돼 불가피하게 저임금 노동자를 고용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거나 장시간 노동·높은 노동강도·임금 체불 및 산재 미신고 순응 등의 요인 때문일 수 있다”며 “둘 다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외국인 불법고용 확산, 품질·안전까지 위협 = 저가 수주로 100원짜리 공사를 65원에 낙찰받으면 맞추기 위해 비합법고용 외국인을 투입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단가를 후려치거나, 합법 신분이 아닌 노동자를 고용해 신고가 어려운 점을 악용해 임금을 깎는 방식으로 단가를 맞춘다.
현재 공공공사는 ‘시중노임단가’를 기준으로 공사비를 산정하지만 실제 현장에서는 하수급 단계에서 임금이 절반 이하로 깎이는 경우도 많다.
심 대표는 “발주처는 기준임금을 적용했다고 주장하지만, 하도급 단계에서 삭감된 인건비는 감시할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저가 수주→노무비 삭감→외국인 불법고용→저가 낙찰의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 악순환을 끊는 유일한 방법이 ‘임금 하한선 규제’”라고 강조했다.
미국은 1931년 도입된 ‘프리베일링 웨이지(Prevailing Wage)’ 제도를 통해 공공공사에서 노동자에게 지급되는 임금의 하한선을 법으로 정한다. 지역·직종별 적정임금 이하로는 입찰이 불가능하다.
독일도 1993년 유럽연합 통합 이후 저임금 동유럽 노동자의 불법 취업이 심화되면서 품질 저하와 부실 시공 문제가 대두됐다. 이로 인해 독일 노동자의 임금 수준과 근로조건이 위협받고 건설업체 도산과 실업이 증가했다. 노조의 ‘내·외국인 동일임금 지급’ 요구가 받아들여지면서 1997년부터 건설업 최저임금제를 시행 중이다.
심 대표는 “두 나라 모두 입찰 단계에서 임금 삭감이 불가능하므로 고숙련 내국인을 우선 고용하게 되고 품질과 안전 수준이 향상됐다”며 “실제 미국은 Z세대가 임금과 고용 안정성이 높은 블루칼라 직업을 선호하는 추세”라고 설명했다.
미국 노동부 조사에 따르면 적정임금제 시행 이후 재하도급을 자제하고 산업재해는 50%, 사망사고는 15% 줄었다. 장기적으로는 품질 향상으로 유지보수 비용(LCC)을 절감하는 효과도 확인됐다.
◆문재인정부, 적정임금제 도입 공표했지만 = 우리나라도 문재인정부 시절인 2017년 12월 일자리위원회가 적정임금제 도입을 공표했지만, 아직 법제화되지는 않았다. 서울시는 2017년 5월, 경기도는 2019년 1월 각각 조례를 제정해 공공공사에 한해 제한적으로 시행 중이다.
국회에는 복기왕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대표발의한 ‘건설산업기본법’ 개정안이 계류 중이다. 개정안은 직종별 ‘적정임금’을 국토교통부 장관이 고시하고 이를 도급금 산출 내역에 명시하도록 의무화한다. 공공공사뿐 아니라 일정 금액 이상의 민간공사에도 적용 범위를 확대하는 내용이다.
심 대표는 “임금 하한선을 두면 비합법고용 외국인이 많더라도 인건비를 깎아 입찰가를 낮추는 편법은 불가능해진다”며 “적정임금제가 확산되면 내국인 고용이 늘고 기능인력의 숙련이 축적되며 품질·안전·청년층 유입이 동시에 개선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어진 토론에서 정길채 민주당 노동정책 수석전문위원은 “새 정부의 방향은 정해진 만큼 최대한 빨리 적정임금제 입법화를 추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한남진 기자 njhan@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