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투의 유혹에 빠진 정치권…‘경조사 재테크’ 논란
여야 정치인, 축의금·부의금·책값 명목으로 현금 수억씩 챙겨
야 ‘최민희 방지법’ ‘출판기념회 금지법’ 천명 … 실현 미지수
10여 년 전, 당시 실세로 꼽히던 청와대 비서관이 부친상을 당했다. 상가에는 조문객이 끊이지 않았다. 당시 부의금을 접수받았던 인사는 “이름만 들으면 알만한 기업들이 보낸 봉투가 수백 개가 넘었다. 봉투마다 50만원, 100만원씩 들어있었다. 상주인 비서관과 딱히 친분이 있기보다는 그냥 보험용 같았다. 다 합치니 몇 억되더라”고 전했다. 상가를 찾은 동료 비서관은 “어르신이 자식 선거 비용 마련해주고 가셨네”라고 읊조렸다.
정치권의 ‘경조사 재테크’가 또 다시 도마 위에 올랐다. 청탁금지법 소위 김영란법에서 경조사비는 5만원을 상한선으로 두고 있지만, 현실에서는 훨씬 많은 액수가 오가면서 ‘경조사 재테크’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한 것. 정치인들의 은밀한 정치자금 모금법으로 알려진 출판기념회도 ‘경조사 재테크’와 동일선상에서 지적받는다.
정치권의 ‘경조사 재테크’ ‘출판기념회 재테크’는 암묵적 관행으로 자리 잡았다. 위법 소지가 크지만, 막대한 현금을 손에 쥘 수 있다는 유혹을 떨치기 어렵기 때문이다. 국세청이나 선관위도 파악하지 못하는 막대한 현금을 손에 쥔 정치인들은 이 돈을 법의 테두리를 넘어서는 은밀한 용도로 사용하기 십상이다. 불법의 악순환 고리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국회 과학기술방송통신위원장인 최민희 민주당 의원이 딸 결혼식 당시 이동통신사 대표(100만원)와 종합편성채널 관계자(30만원) 등으로부터 축의금을 받았다가 돌려준 사실이 알려지자, 야권에서 “뇌물은 돌려줘도 뇌물죄가 성립한다. 피감기관으로부터 받은 100만원이라는 금액은 결코 적은 금액이 아니고 사회적 상식에도 맞지 않는다”(송언석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지적이 쏟아졌다. 최 의원의 축의금 논란은 우연찮게 시작됐지만, 사실 정치권에서 위법 가능성이 농후한 ‘경조사 재테크’ ‘출판기념회 재테크’는 흔하게 벌어지고 있다.
김민석 총리는 인사청문회 당시 국회의원 세비에 비해 지출이 많았다는 지적이 제기되자, “부의금이 1억6000만원 정도 되는 것 같고, 출판기념회 한 번에 1억5000만원, 그 다음이 1억원 정도(수익이 있었다)”고 답변했다. 국회의원 당시 경조사와 출판기념회로 무려 4억1000만원의 현찰을 만들었다는 얘기다. 노웅래 전 민주당 의원은 검찰의 자택 압수수색 과정에서 발견된 현금 3억원에 대해 “선친이 돌아가셨을 때 (부의금으로) 대략 8000만원, 장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대략 1억2000만원, 그리고 두 차례 출판기념회 축하금으로 구성된 돈”이라고 해명했다. 노 전 의원 역시 경조사와 출판기념회를 통해 3억원이란 큰 돈을 모은 것이다.
야권에서는 이재명 대통령 아들 결혼식에도 의심의 눈초리를 던진다. 이 대통령은 취임 직후 아들을 결혼시켰다. 주진우 국민의힘 의원은 27일 “이 대통령 아들의 삼청각 결혼식은 하객이 인산인해를 이뤘다. 축의금 계좌가 공개됐고, 안 받았다는 얘기가 없는 걸 보니 많이 걷혔을 것이다. 현직 대통령의 자녀 결혼식 축의금 정가는 얼마일까? 가늠조차 힘들다”고 주장했다.
상당수 정치인이 사실상 ‘경조사 재테크’ ‘출판기념회 재테크’를 통해 막대한 현금을 챙기면서 김영란법을 사문화시킨다는 지적이다. 야권 인사는 28일 “솔직히 정치인들이 경조사나 출판기념회 통해 수억원씩 챙기는 건 공공연한 비밀 아니냐. 다들 은밀한 현금을 챙길 수 있다는 유혹 때문에 예방책은 고민하지 않는 것 같다”고 말했다.
국민의힘은 최민희 축의금 논란을 겨냥해 ‘최민희 방지법’을 추진한다는 입장이다. 국회의원이 피감기관 등에서 경조사비를 받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국민의힘 30·40대 의원들은 지난 7월 정치인들의 출판기념회를 금지하는 내용의 법 개정을 촉구하기도 했다. 하지만 정치권이 실제 ‘경조사 재테크’ ‘출판기념회 재테크’를 원천봉쇄할지는 미지수다. 돈봉투의 유혹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국민적 공분이 식으면 어물쩍 넘어갈 가능성이 높다는 지적이다.
엄경용 기자 rabbit@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