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지않는 산재, 한국판 ‘로벤스보고서’필요”
1960년대 영국과 닮아 … “여야·노사 모두 지지 받는 정치과정 중요, 국회가 마중물 역할해야”
우리나라 산업안전보건 체계가 1960년대 영국과 유사한 한계에 직면해 있다며 1970년 영국의 산업안전보건체계를 개혁한 로벤스위원회를 한국식으로 가동해야할 시점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지난달 31일 국회입법조사처의 자료에 따르면 국회 주도의 사회적 대화 구축 방안을 모색하는 연속 전문가 간담회에서 류현철 일환경건강센터 이사장은 ‘로벤스위원회와 보고서의 한국적 함의’라는 주제 발표에서 이같이 말했다.
◆영국 ‘로벤스보고서’, 산업안전보건 대전환 = 1960년대 영국은 급속한 산업화와 낡은 산업안전보건 체계로 산업재해가 극심한 시기였다. 제2차 세계대전 이래로 가장 큰 인명피해인 약 30만명이 매년 산업재해를 당했고 심지어 발생한 산재의 약 40%가 보고되지 않았다.
당시 영국은 9개의 법률과 500여개의 규정이 존재했지만 너무 많은 법규가 파편적으로 확장되면서 현장 규제가 약화되는 부작용이 발생했다.
이에 영국 정부는 1970년 ‘일터에서의 안전 및 보건에 관한 위원회(Committee on Safety and Health at Work)’를 출범시켰다. 위원장으로는 노동당 의원이자 보건부 차관을 역임하고 산업안전의 옹호자였던 로벤스 경(Lord Robens)이 임명됐다.
위원회는 1970년 5월 29일부터 1972년 6월까지 2년간 특정 집단의 대표성을 갖춘 인물보다 실무 경험이 풍부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의견을 청취했다.
그 결과물로 위원회는 ‘일터에서의 안전 및 보건’ 보고서를 제출했다. 위원장의 영향력이 컸기 때문에 ‘로벤스보고서’라고 부른다.
로벤스보고서는 일터에서의 안전 및 보건에 관한 대대적인 개혁을 이뤄내면서 현대 영국을 만든 기념비적인 정책보고서로 평가받고 있다.
로벤스보고서는 핵심 철학이자 원리인 자기규율(Self-regulation), 노사공동책임, 포괄의무, 보편적 적용, 독립된 통합감독체계 등을 제시하며 산업안전보건 혁신의 토대를 마련했다.
로렌스보고서 제안에 따라 1974년 산업안전보건법이 제정되고 산업안전보건청 설립과 위험성평가 제도화가 이뤄졌다. 그 결과 영국의 근로자 10만명당 재해율은 1981년 대비 2020년에 1/5 수준으로 줄었다.
로벤스위원회는 노동당과 보수당을 포함해 영국경총(CBI) 영국노총(TUC) 모두의 지지를 얻었다.
류 이사장은 “집권당이 노동당에서 보수당으로 변경됐음에도 산업안전 개혁이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은 로벤스 경의 강력한 추진력과 정치과정이 여·야 및 노·사 모두의 합의를 이끌어내면서 산업안전보건에 대한 핵심 철학을 관철시켰다”며 “이 점은 한국에 큰 시사점을 준다”고 강조했다.
◆“형식적 책임 넘어 실질적 위험관리 체계로” = 류 이사장은 한국의 산업안전보건 체계가 여전히 형식적 책임에 머물러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현재 한국의 산업안전보건 체계는 사업주에게 안전보건관리 의무를 부과함으로써 형식적으로 사업주가 산재예방의 최종 책임자가 되도록 하고 있다”면서 “그러나 이러한 책임은 주로 문서 제출, 규정 마련, 교육 실시 등의 절차적·형식적 의무 이행에 머무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반면 우리나라는 실제로 작업현장의 위험요인을 파악하고 제거하며 실질적 위험관리 능력과 권한을 행사하는 내용적 책임을 질 능력이 사업주에게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산재가 줄지 않고 있다는 분석이다.
류 이사장은 “대한민국 현실이 1960년대 영국의 상황과 흡사하다“며 “당시 영국이 로벤스위원회를 통해 안전보건체계를 전면 개혁했듯이 한국도 한국판 ‘로벤스위원회’를 작동시킬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여야가 정파를 넘어 산업안전보건의 핵심 철학에 동의하고 대표성보다 실무경험을 갖춘 노·사가 제도 개선 필요성에 집중한다면 한국에서도 충분히 작동할 수 있다”면서 “특히 산업안전보건 분야에서 여·야 및 노·사 모두의 지지를 받는 정치과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국회가 사회적 대화의 플랫폼으로서 ‘한국판 로벤스위원회’의 마중물 역할을 해주길 기대한다”고 강조했다.
한남진 기자 njhan@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