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APEC, 한국 외교에 남겨진 과제

2025-11-05 13:00:01 게재

한미 관세협상 타결, 한중일 정상회담 ‘성공적’ … 국제사회 위한 문제해결 능력은 미흡

1989년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가 창설될 당시 한국은 여러모로 자신감에 차 있었다. 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로 한국이 이룬 경제발전과 민주주의 정착이 세계인의 눈을 사로잡았고, 무엇보다도 북방정책의 야심 찬 출발로 인해 동구권 국가로서는 처음으로 헝가리와 수교를 맺은 직후의 시점이기도 했다. 전통적으로 미국과 일본을 상대로 한 양자외교에 능했던 우리 정부는 냉전구도가 허물어지는 새로운 세상을 맞이해 다자외교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던 때였다.

물론 과거 박정희정권 시기인 1966년부터 1972년까지 존재했던 아시아태평양이사회(ASPAC, Asian & Pacific Council)라는 다자외교의 외교사적 의의를 모르는 바는 아니다. 다자외교를 본격화한다고 해도 분단국의 입장에서 한미동맹을 가장 중요한 외교안보 자산으로 삼고 있는 입장에서 안보이슈를 다루는 다자무대는 부담이 컸다.

전세계 인구의 40%, 글로벌 국내총생산(GDP)의 60%를 차지하는 APEC은 무척 매력적인 무대였다. 더욱이 세계 초강대국에 둘러싸인 지리적 요인으로 인해 가능한 태평양 인접 국가들을 대상으로 한 교역을 통해 우리도 태평양을 넓게 활용할 수 있는 점 역시 외교적으로 적극 활용할 포인트였다.

1991년 서울 각료회의, 2005년 부산 정상회의, 그리고 이번 경주 정상회의, 이런 경험이 쌓이면서 한국은 APEC의 주요국이 되었다. 특히 12개 회원국으로 출범했던 APEC이 처음 3개 회원국을 추가로 받아들였던 1991년 서울 회의는 그 대상이 중국 대만 홍콩이었다는 점에서 이들 3개 주체가 동등한 입장의 국가는 아니지만 당시 한국의 외교 지혜가 빛을 발한 순간이었다.

이재명 대통령이 31일 경북 경주시 라한셀렉트호텔에서 열린 2025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갈라만찬에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함께 입장하고 있다. 연합뉴스

G2와 다자 회원국 효과적 결합 긍정적

이제 경주에서 풀어 놓은 한국 외교의 보따리를 앞으로 어떻게 알차게 실용의 차원에서 주어 담을 것인가가 관건이다. 성과와 한계를 한 마디로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핵심적인 한 가지씩을 짚어보기로 하자.

먼저 성과를 보자. 한국 입장에서 주요 양자와 다자를 효과적으로 결합한 점은 매우 긍정적이다. 한미 정상회담을 통해 3500억달러 투자패키지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자유무역 정신을 드러나지 않게 깔고 있었던 점, 그리고 한중 및 한일 정상회담에서 구체적인 합의 안건은 없었지만 문화 협력과 미래 이익을 강조함으로써 다자질서의 기초가 되는 보편적인 가치의 중요성을 확인한 바 있다.

특히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2014년 방한 이후 11년만의 첫 방한이고, 다카이치 일본 총리의 경우 지난달 21일 공식 취임 이후 불과 열흘 만에 한국을 찾은 셈이다. 그간 중국과는 사드사태, 한한령(한류 금지령), 경제보복 등 우여곡절이 있었던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다. 첫 단추의 중요성을 잘 아는 한국정부의 입장에서 중국 및 일본과의 정상회담은 한미 정상회담과 분명 그 성격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AI 관련 CEO 서밋 구체성 없어 아쉬움

다음으로 한국 외교의 한계로는 여전히 국제사회를 위한 ‘문제 해결 능력’의 부족을 지적하고자 한다.

예를 들어 이재명 대통령은 APEC 공식 개최 직전에 열린 CEO 서밋에서 ‘AI를 통한 미래 지속가능성’을 강조했고 관련해 ‘연대 플랫폼을 통한 혁신’의 필요성을 제시했다. 모두가 동의할 만한 내용이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AI 관련한 국제규범의 방향성을 제시하거나 혹은 ‘AI의 글로벌 플랫폼 등장’ 과정에서 한국이 허브 역할을 담당하겠다고 했는데, 구체적인 아이디어를 조금이라도 더 밝혔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물론 국가 정상은 큰 그림을 제시하는 게 고유 임무이고, 다양한 후속 회담과 조치를 통해 큰 구상을 실천해나가는 게 일종의 역할 분담임을 잘 알고는 있다. 하지만 문제 의식에서는 옳았지만 국제사회를 향해 구체적인 해결 능력을 내놓지는 못하고 다른 국가에 의해 규범이 설정되면 그 다음 실천단계에서는 또 늘 모범이 되는 우리 외교의 고질적인 한계를 떠올려 볼 때 이번 APEC에서도 같은 내용의 아쉬움을 가지게 된다.

연장선에서 모든 나라가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한국의 경우 안보이익과 경제이익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지구촌 곳곳을 들여다보면 중동 아프리카 유럽 동남아 등지에는 종교 인종 환경 정체성 등 다양한 이해관계를 놓고 전쟁을 경험하기도 하고 생존적 위기에 직면하기도 한다. 우리는 상대적으로 그런 이해관계에서 자유로운 대신 안보와 경제 영역에 모든 국가이익이 매몰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안보와 경제 영역에 모든 국가이익 매몰

언제부터 인가 ‘경제안보’라는 표현이 빈번히 등장하고 있다. 이번 경주 APEC에서도 ‘경제안보’는 핵심 키워드의 하나였다. 원래 국제정치의 전통적인 관점에서 ‘경제 안보’는 긍정적이고 선순환적인 의미를 가진다. 예를 들어 국가들 간 경제관계의 심화와 상호의존은 잠재적 갈등이 있는 안보 문제를 자연스럽게 해결한다는 논리구조이다. 2차세계대전이 유럽 국가들 간 마지막 대규모 전쟁일 것이라는 분석은 바로 이런 경제적 상호 의존 효과가 안보 해결로 이어진다는 판단을 근거로 하고 있다.

그런데 현시점에서 대부분의 세계 시민들은 ‘경제안보’를 정확히 거꾸로 이해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즉, 에너지 자원이나 공급망 이슈 등으로 인해 경제적 이익은 곧 안보적 이익과 동등한 지위를 가지게 되어, 안보는 물론이고 경제 역시 죽고 사는 사활적 이익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경제-안보 간 상호작용을 뒤집어 놓음으로써 국제사회 전반에 걸친 위기 의식이 고조된 점은 사실이다.

EU의 6000억달러 및 일본의 5500억달러와 비교해 한국의 3500억달러는 훨씬 더 큰 돈이다. 우리 연간 예산의 70%를 웃도는 수준이고 현 외환 보유액의 80% 수준이다. 대미 투자패키지와 관세협상이 연동된 상황에서 동시에 한미 간에는 주요 안보 현안도 다뤄졌다. 위에 언급한 논리로 인해 안보와 경제가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상황을 피할 수는 없지만 한반도 상황에서 이 둘 사이에는 적절한 거리가 유지될 필요가 있다.

한국의 국방비 인상, 미국산 무기 구입, 핵추진잠수함 건조, 원자력협정 개정 등의 사안은 APEC의 틀 안에 과도하게 들어오지 않는 게 좋다. 국제사회의 어떤 나라보다도 경제영역과 안보영역을 동시에 사활적 이익으로 품고 있는 한국은 이 둘의 과도한 연결보다는 적절히 분리된 상태에서 각각의 영역 안에서 발휘할 수 있는 외교의 자율성이 훨씬 더 크기 때문이다.

트럼프의 대북 스탠스 변화에 주목을

마지막으로 북한 문제를 생각해 보면 김정은 위원장이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것이란 점은 예상되었던 부분이라 우리의 외교안보 전략에 큰 변수는 아니다. 그런데 트럼프 대통령 쪽이 어떨지는 유심히 지켜봐야 할 것 같다.

물론 북미 정상 미팅 불발 직후에도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에 대한 평화 메시지를 발신하기는 했지만 필자의 생각으로는 그 어조(tone)가 조금 달랐다. 지금의 대북 스탠스를 완전히 바꾸지는 않더라도 트럼프 대통령이 인식하는 한반도 문제에 대한 접근에 다소 변화가 오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하게 된다. 기우이기를 바라며 이 부분 역시 우리 정부 하기에 달렸다고 생각한다.

관세협상 타결 이후 러트닉 상무장관이 다소 다른 얘기를 흘리고 있는 점, 핵연료 추진 잠수함의 건조를 필라델피아에서 하라는 트럼프의 언급을 우리 정부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는 등 다양한 뒷얘기가 흘러나오고 있다. 이런 부분들에 대해 정확하게 확인한 후 다뤄야 할 영역이다.

자원이라곤 인구뿐인 한국의 입장에서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후퇴는 치명적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 APEC은 여러가지 우려를 효과적으로 방어하고 해결한 자리였다. 결국 외교도 내치(內治)의 연장일 수밖에 없으니 포스트-APEC을 위한 국민적 지혜가 더 절실한 순간이다.

이재명 대통령이 31일 경북 경주시 라한셀렉트호텔에서 열린 2025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갈라만찬에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함께 입장하고 있다. 연합뉴스
박인휘 이화여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