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에너지
‘산업의 쌀’ 옥수수, 한국에게도 기회의 문 연다
바이오산업, 바이오에탄올, 지속가능항공유(SAF), 동물 사료, 대체 단백질. 이 거대한 변화의 배후에는 하나의 작물이 있다. 옥수수다. 세계에서 가장 많이 생산되는 곡물이자 현대 식품 시스템의 근간, 그리고 육식 문명의 토대를 만든 보이지 않는 동력이다. 이제 옥수수는 음식의 재료를 넘어 에너지와 첨단 바이오 소재를 떠받치는 산업자원으로 다시 정의되고 있다.
세계는 지금 옥수수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산업경쟁에 돌입했다. 미국 브라질 중국이 생산 기록을 갈아치우는 가운데 특히 브라질의 변화가 눈부시다. 콩 수확 이후 휴경하던 땅에 옥수수를 재배하는 이모작 체계, 이른바 샤프리냐 혁명을 통해 세계 옥수수 시장의 핵심국으로 부상했다.
미국은 생산량의 40%를 바이오에탄올로 전환하면서도 막대한 잉여분을 수출하며 시장을 방어하고, 중국은 2021년부터 옥수수 생산이 쌀을 앞지르며 곡물 전략의 무게 중심을 이동시켰다. 전쟁으로 흔들렸던 우크라이나까지 복귀하면 글로벌 공급량은 더 늘 것이다.
세계는 지금 ‘옥수수 잉여’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이는 단순히 식량이 풍부해진다는 의미를 넘어선다. 옥수수는 그 자체로 ‘산업 플랫폼’이다. 옥수수가 미래산업의 지형을 어떻게 바꾸고 있는지 주목해야 한다.
첫째, 에너지 전환의 심장이다. 바이오에탄올은 이미 검증된 친환경 대체 연료다. 미국은 옥수수 40%를 바이오에탄올에 활용하며, 브라질은 기존 사탕수수 기반에서 나아가 옥수수와 농업 잔재물까지 원료를 확장하고 있다. 10년 내 생산량을 50% 이상 늘린다는 목표다. 이는 곧 탄소중립 시대의 핵심 과제인 지속가능항공유(SAF) 산업과도 직결된다.
둘째, 미래식품 산업의 기반이다. 20억달러를 돌파한 식물성 대체 치즈 시장, 정밀발효 기술로 만드는 대체 단백질 산업이 원유 중심의 축산업을 위협하고 있다. 이 ‘바이오파운드리’ 산업의 핵심 배양원이 바로 옥수수 전분을 가공해 얻은 포도당이다.
옥수수가 바꾸는 미래산업 지형 주목해야
그렇다면 한국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곡물 자급률이 20%대에 불과하고 사료용 곡물은 거의 전량을 수입하는 한국에게 옥수수 잉여 시대는 위기인 동시에 절호의 기회다. 패러다임을 ‘단순 수입·소비’에서 ‘전략적 비축·가공’으로 전환해야 한다. 핵심은 ‘대규모 곡물저장시설’의 확보다. 한국은 동북아 국제 곡물 교역의 주요 노선에 위치해 지리적 강점을 가진다. 평택 군산 부산 등 주요 항만에 대규모 곡물 저장·가공 인프라를 구축하고 이를 바이오파운드리 단지와 연계해야 한다.
이 전략적 거점이 확보되면 한국은 두 가지 핵심산업을 즉각 선점할 수 있다. 첫째는 ‘바이오에탄올’과 ‘사료’의 동시 확보다. 한국은 세계 최고 수준의 정밀화학 및 공정기술 역량을 보유하고 있다. 우리가 막대한 잉여 옥수수를 수입해 바이오에탄올로 가공한다면 그 생산공정의 효율을 극대화할 수 있다. 이는 에너지 안보를 확보하는 동시에 탄소중립 목표를 실현하는 핵심 전략이 된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 과정에서 나오는 부산물, 즉 ‘옥수수 박(DDGS)’이다. 이는 고단백 사료로, 가축 사료의 98%를 수입에 의존하는 한국 축산업계의 생산비를 획기적으로 낮출 수 있다. 옥수수 하나로 에너지 자원과 사료 자원을 동시에 확보해, 물가 안정과 축산 기반 안정을 도모할 수 있는 것이다.
둘째는 ‘미래 바이오산업’의 기반 구축이다. 이 곡물 허브는 바이오에탄올을 넘어 대체 단백질, 바이오 플라스틱, 의약품 소재를 생산하는 ‘바이오파운드리’ 산업의 심장이 될 수 있다. 안정적이고 저렴하게 원료를 공급하는 전초기지가 되는 셈이다. 특히 정밀발효 기술을 활용한 차세대 단백질 생산은 글로벌 식품산업의 게임체인저로 떠오르고 있으며 이 모든 공정의 출발점이 바로 옥수수에서 추출한 당원료다.
한국의 미래, 곡물 허브와 바이오에 달려
물론 이것이 가능하려면 정부 부처 간 칸막이를 넘어 농식품부 산업통상부 기후에너지환경부가 하나의 청사진 아래 움직여야 한다. 여기서 핵심은 바이오에탄올의 연료 혼입 정책이다. 시장 상황에 따라 혼입 비율을 유연하게 조절하면서 바이오, 사료, 에너지 믹스를 전략적으로 구성할 수 있다.
한국은 원료를 수입해 가공하고 수출하는 산업에서 탁월한 경쟁력을 보유하고 있다. 반도체 석유화학 철강이 그랬듯 이제 옥수수도 우리의 강점으로 만들 차례다. 기후위기와 에너지전환이 교차하는 지금 옥수수가 만들어낸 기회의 장에서 한국의 식량안보와 바이오산업 전략을 새롭게 써야 한다. 농식품 분야를 국가 전략산업으로 인식하는 패러다임의 전환, 지금이 바로 그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