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시평
대만의 반도체 주권 지키기가 한국에 주는 교훈
미중 기술패권 경쟁이 격화되는 가운데 대만은 다시 세계 정치의 중심에 섰다. 반도체 공급망의 핵심이자 ‘실리콘 방패’를 지닌 이 섬은 어느 쪽으로 기울어도 위험하고 어느 쪽에도 휘둘리지 않아야 살아남는다. 실리콘 방패란 첨단 반도체 생산능력이 국가안보와 외교적 억지력으로 작용한다는 의미다.
미국정부는 기술 봉쇄와 공급망 재편으로 대만을 자국 체제 안에 편입하려 하고 중국정부는 군사·경제압박으로 대만의 전략공간을 좁히고 있다. 최근 미국정부가 대만에 제시한 “생산의 절반을 미국으로 이전하라”는 요구는 단순한 협력제안을 넘어 대만의 자율성을 시험대에 올려놓았다. 겉으론 공급망 안정과 동맹강화를 내세웠지만 그 속에는 미국정부의 산업안보와 기술패권 강화 의도가 뚜렷하다.
미국정부는 안보동맹을 경제동맹으로 확장하며 자국 내 제조 기반을 회복하려 한다. 그러나 동맹의 이익이 곧 대만의 이익은 아니다. 만약 미국정부의 요구를 따른다면 대만은 기술주권을 잃고 안보적 레버리지도 약화될 수 있다.
결국 대만이 직면한 과제는 ‘동맹에 충실할 것인가, 자국의 이익을 지킬 것인가’라는 선택이었다. 대만은 전면 굴복 대신 현실적 자율성을 택했다. 협력의 틀은 유지하되 핵심 공정은 국내에 남기고 가오슝을 중심으로 새로운 생산기반을 확충한 것이다. 이는 ‘동맹의 이익이 곧 국익은 아니다’라는 인식 아래 기술주권과 경제안보를 지키려는 실용적 전략이었다.
실리콘 방패 의미 살리며 장기안보 선택
미국정부는 반도체 공급망 안정과 제조 복귀를 명분으로 대만에 생산비중 확대를 요구했다. 2024년 중반 미국 상무부가 밝힌 공급망 회복 로드맵에서 TSMC의 미국 내 생산비중을 ‘50% 수준으로 높이는 방안’이 언급되었고 대만은 즉각 “그런 합의는 없으며 동의하지 않는다”고 선을 그었다.
이는 단순한 외교 제스처가 아니라 기술주권을 지키려는 국가적 방어선이었다. 대만의 첨단공정은 국가안보의 핵심이며 생산 중심이 미국으로 옮겨가면 기술적 우위가 흔들리고 실리콘 방패로서의 의미도 약화된다. 대만은 이런 구조적 위험을 인식하고 협력하되 종속은 피하는 대등한 파트너십을 추구했다. ‘협력하되 중심은 지킨다’는 원칙은 대만이 장기안보를 택한 현실적 판단이었다.
이와 동시에 대만은 국내 생산기반 강화에 나섰다. 대표적 사례가 가오슝의 TSMC 신규 팹 증설이다. 2나노급 첨단공정을 시작으로 향후 1.4나노 공정까지 확대되는 이 계획은 해외 이전에 따른 기술유출을 차단하고 국내 기술 생태계를 강화하려는 결정이었다. 가오슝은 전통적 중화학공업 도시에서 첨단산업 도시로 변모하고 있으며 대학·연구기관이 반도체 인재양성 프로그램을 신설해 ‘남부 반도체 클러스터’가 빠르게 안착 중이다.
대만의 행보는 국가의 이익이 동맹의 이익과 다를 수 있음을 분명히 한다. 미국정부는 공급망 동맹을 내세우지만 실상은 자국 산업기반과 기술패권 유지가 목표다. 대만은 이 함정을 인식하고 핵심 생산라인을 국내에 남기며 국익을 우선시했다. 단기적으로 불편을 감수했지만 장기적으로 협상력을 높이는 기반을 확보했다. 대만이 기술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한 미국정부도 대만을 함부로 대할 수 없다.
대만의 대미 전략은 한국에도 중요한 시사점을 던진다. 동맹이 강조될수록 한국은 기술주권과 산업자율성을 지키며 국익의 우선순위를 재정립해야 한다. 미국정부가 반도체 공급망을 자국 중심으로 재편하는 상황에서 한국은 협력의 명분과 국익의 실리 사이에서 능동적 선택을 해야 한다. 대만은 압력 속에서도 핵심 공정을 국내에 유지하려 한다. 이는 한국이 동맹의 틀을 유지하되 핵심기술과 생산기반을 국내에 두는 전략을 병행해야 함을 시사한다.
동맹구조 안에 국익 중심 협력 전략 설계를
한국과 대만은 각각 메모리와 비메모리 분야에서 강점을 지니며 상호보완적 구조를 형성한다. 최근 미국 대만 한국의 공급망은 미국(설계·장비) 대만(파운드리) 한국(메모리) 중심의 기능 분화로 발전하고 있으며 이 구조는 경쟁보다 협력의 틀로 발전할 수 있다.
한국은 이러한 삼각구조 속에서 단순한 참여자가 아니라 동맹 협력체제 안에서 국익에 맞는 역할을 조정하고 강화해야 할 주체다. 국내적으로는 첨단 패키징·후공정·AI반도체 등 차세대 분야의 경쟁력을 키우고 대외적으로는 대만과의 기술협력·인재교류 등을 제도화해 실질적 협력의 기반을 넓혀야 한다.
동시에 미국정부의 요구를 그대로 따르기보다 자국 산업의 지속성과 기술적 자율성을 보장하는 레드라인을 분명히 해야 한다. 한국이 지향해야 할 것은 대만의 사례처럼 동맹구조 안에서 국익 중심의 균형 있는 협력전략을 설계해 자율성과 현실적 지혜를 병행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