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문체부 ‘종묘’ 설전, 정치공방 우려

2025-11-10 13:00:17 게재

“끝까지 막을 것” vs “지방정부 사업 폄훼”

전문가 “대화없이 정치공방만 남으면 최악”

서울 종묘 인근 초고층 빌딩 건립을 둘러싼 서울시와 문화체육관광부의 대립이 정치공방으로 흐를 조짐을 보이고 있다.

10일 내일신문 취재를 종합하면 양측 주장은 개발과 보존 논리로 좁혀진다. 서울시는 “도심 기능 회복과 주민 삶의 질 개선”을 앞세우고 문체부와 문화재청은 “세계유산 경관 훼손”을 내세우며 맞서고 있다. 갈등 쟁점이 ‘문화재 보존’ 대 ‘개발 찬반’으로 단순화되면서 정책 논의가 감정 대립으로 흐르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서울시는 “서울 도심의 슬럼화를 막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으로 본다. 종묘 주변은 오랜기간 개발이 제한돼 주거환경이 노후화됐다. 인근 주민들은 “재개발이 막혀 집을 고칠 수도 없다”고 불만을 쏟아낸다. 반면 문화재청은 “높은 건물이 종묘의 시각적 경관을 가린다”며 유네스코 세계유산 보존 의무를 강조한다.

지난 7일 허 민 국가유산청장이 서울 종묘에서 종묘 앞 개발규제 완화 관련 대법원 판결에 대한 입장 발표 기자회견을 하던 중 항의하러 온 세운4구역 주민들과 대화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문제는 두 기관 간 소통이 정책적 설득보다 감정적 맞불로 번졌다는 데 있다. 지난달 서울시가 “문화재청이 세계유산을 빌미로 도심 발전을 가로막고 있다”고 비판하자 문화재청은 “서울시가 세계유산 보호의 기본 원칙을 무시하고 있다”고 맞받았다.

전문가들은 해외 사례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고 주문한다. 협의와 공론 과정을 통해 균형점을 찾은 사례가 있기 때문이다. 프랑스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이 대표적이다. 1980년대 프랑스 정부는 루브르 앞 광장에 유리 피라미드를 세우는 ‘그랑 루브르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초반엔 “역사적 미관을 훼손한다”는 거센 반대에 부딪혔지만 정부는 시민·예술계·전문가를 참여시키는 공론 과정을 거쳤고 결국 과거와 현재의 공존이라는 방향에 공감대가 형성되면서 루브르의 명성은 더욱 공고해졌다.

영국 리버풀은 실패 사례로 꼽힌다. 항만 재개발 과정에서 초고층 건물들이 들어서자 유네스코는 “도시 경관이 심각하게 훼손됐다”며 2021년 세계유산 지위를 박탈했다. 지역경제 회복에는 보탬이 됐지만 도시의 문화적 정체성이 흔들렸다는 비판이 뒤따랐다.

일본 도쿄 황궁 인근 사례도 눈에 띈다. 황궁은 도심 한복판에 있지만 주변에는 고층 빌딩들이 즐비하다. 일본 정부는 ‘시선 경관 보호선’을 설정해 황궁을 향한 주요 조망축을 확보하고 고층을 짓되 건물 높이를 구역별로 다르게 제한했다. 개발을 전면 차단하지 않고 문화재 보존과 도시 활성화를 동시에 꾀한 절충형 모델로 꼽힌다.

전문가들은 서울의 경우도 보존과 개발 한쪽의 일방 논리보다 ‘조정 및 협의 구조’가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한 도시계획 전문가는 “종묘는 세계유산이지만 동시에 인근에는 시민이 살아가는 공간이 있다”면서 “문체부와 서울시가 공동조사단을 꾸려 문화경관 영향평가를 객관화하고 주민 의견을 제도적으로 반영하는 공론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림자와 하늘 논쟁도 소모적이라는 지적이다. 서울시가 모의실험을 진행한 결과 “종묘에 그림자가 드리우지 않는다”고 반박하자 문체부장관은 “그림자가 문제가 아니다. 하늘을 가리지 않느냐”고 되받았다. 하지만 종묘 안에서 바깥을 보는 경관과 종묘 밖에서 종묘를 바라보는 경관 가운데 어느 쪽이 중요하냐는 식의 단순 논란은 사태의 본질을 흐릴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 의견이다.

전문가들 사이에선 문화재 보존과 주민 삶 개선을 위한 도시개발이 대립하는 구도를 벗어나는 것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누가 옳으냐식 정치공방이 아닌 함께 살 길을 찾자는 논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또다른 전문가는 “그림자가 문제라면 건물을 낮추면 되지만 이번 논란의 핵심은 건물의 높이가 아니다”라며 “문화유산을 지키면서 시민의 삶을 개선할 수 있는 도시관리 시스템을 어떻게 갖추느냐의 문제”라고 말했다.

이제형 기자 brother@naeil.com

이제형 기자 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