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에너지

주 4.5일제와 기후위기 대응

2025-11-12 13:00:00 게재

지난 5월 말, 대선을 코앞에 둔 시점의 일이다. 한 경제지의 기사가 눈길을 끌었다. ‘가장 우려하는 대선 공약은 주 4.5일제’라는 제목의 기사였다. 이코노미스트클럽 회원 20명에게 가장 우려되는 공약을 물었더니 7명이 주 4.5일제 도입을 꼽았다는 것이다. 만일 같은 질문을 노동이나 환경 분야 전문가들에게 했다면 어땠을까. 아마 정반대의 결과가 나왔을 것이다. 필자 주변에는 기후위기와 노동의 기계화 대응수단으로 노동시간 단축에 기대를 거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당연한 얘기지만 주 5일 근무제는 주 6일제가 그랬던 것처럼 불변의 원칙이 아니다. 시대와 문화를 막론하고 노동시간은 사회적 규범과 합의의 산물이었다. 주 5일 40시간 근무는 100년 전 자동차 조립라인의 근무 형태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포드가 주당 근무시간을 48시간에서 40시간으로 줄인 이후, 주 5일 근무는 하나의 사회적 규범으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지난 세기 동안 일하는 방식과 업무 규범, 노동자들의 가치관은 끊임없이 변화해 왔다.

사실 노동시간 단축의 가치는 단순히 ‘덜 일하고, 더 많이 놀자’는 차원을 넘어서는 것이다. 시간을 통제할 수 있는 권리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자유에 속한다. 덜 일하는 것의 의미가 단지 노동자의 인간다운 삶과 권리 회복에만 국한되는 것도 아니다. 노동시간이 줄면 고용이 늘고 생산성이 향상되는 경우가 많다. 환경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 다만 그 효과의 크기는 경제구조와 임금수준, 업종특성, 근무방식 등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노동시간 줄면 탄소배출량도 줄게 돼 있어

노동시간 단축이 탄소배출량 감소로 이어진다는 주장은 허황된 가설이 아니다. 다수의 연구와 실험을 통해 검증된 경험적 사실에 가깝다. 2006년 미국 워싱턴 소재 경제정책연구센터의 연구 결과는 당시로선 꽤 충격적인 것이었다. 미국인들이 유럽인들과 비슷한 수준으로 노동시간을 줄이면 에너지 소비량이 무려 20%나 감소하는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2018년 보스턴 칼리지대학이 모델 추정기법을 사용해 6년간의 미연방 주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도 다르지 않았다. 노동시간이 줄수록 탄소배출량도 함께 감소하는 경향이 뚜렷했다.

노동시간 단축은 출퇴근 시 자동차 이용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주4일제 실험을 했던 아이슬란드와 영국에서는 통근거리와 연료 사용량이 1/5 수준으로 줄었다. 네덜란드에서는 사무실 냉난방과 조명시간 단축으로 전력피크를 최대 10% 낮춘 사례가 있다.

여가 방식의 변화도 눈여겨볼만하다. 사람들은 물질적인 소비를 늘리기보다 가족과 시간을 보내거나 스포츠와 문화행사에 더 자주 참여하는 경향을 보였다. 부작용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미국에서는 주말이 길어지면서 비행기를 이용한 해외여행이 늘어났다. 탄소배출이 많은 장거리 항공여행은 다른 저탄소 행동의 감축효과를 상쇄할 수 있다.

노동시간 단축은 기술 진보의 열매를 시간으로 나누는 것이다. 하지만 일을 줄인다 해서 세상이 저절로 나아지는 건 아니다. 주 4.5일제가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실질적인 해법이 되려면 몇 가지 조건을 갖춰야 한다. 무엇보다도 더 많은 여가시간이 탄소집약적인 상품과 서비스 소비로 이어지지 않아야 한다. 노동시간이 줄더라도 사무실과 매장의 운영 시간이나 요일이 그대로라면 효과보다 부작용이 더 클 수 있다.

주 4.5일제는 여러 형태로 구현될 수 있다. 성공하려면 충분한 사전검토와 시범사업을 통해 어떻게 생산성을 유지할 수 있는지, 탄소배출은 실제 얼마나 줄어드는지 등을 면밀히 분석해야 한다. 노동시간 단축의 효과와 부작용은 업종과 기업 규모에 따라 다를 수 있다. 그래서 개별 상황에 맞는 접근방식과 속도 적용이 중요하다. 세브란스병원 카카오 유한양행 등의 경험을 바탕으로 대안을 찾고 실행 방안을 구체화해도 좋을 것이다.

정교하고도 유연한 제도설계가 필수

생산성 저하와 기업 부담 증가에 대한 우려를 불식시키려면 정교하고 유연한 제도설계가 필수적이다. 이 점에서 단계적 접근과 사회적 합의를 강조한 이재명정부의 정책 방향은 바람직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3년 전 세계경제포럼 패널 토론의 주제는 ‘주4일 근무제, 필수인가 사치인가’였다. 참가자들은 인재 부족 시대에 노동시간 단축은 ‘비즈니스 관점에서도 꼭 필요하다’고 의견을 모았다. 20여년 전 주 6일제에서 5일제로의 전환에 반대했던 사람들은 이번에도 주 4.5일제로 경제가 타격을 입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들의 주장은 당시에도 틀렸고 이번에도 틀릴 가능성이 크다. 노동시간 단축에 대한 더욱 전향적인 토론을 기대한다.

안병옥 서울대 지구환경과학부 특임교수 전 환경부 차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