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시평
중국 GGI 구상이 한국에 던지는 질문
세계질서가 거대한 전환기에 들어섰다. 미중 전략경쟁이 구조화되고, 글로벌 공급망과 기술표준, 디지털 규범을 둘러싼 국제정치경제의 무게중심이 빠르게 이동하고 있다.
이런 변화 속에서 중국은 2025년 9월 톈진(天津)에서 열린 상하이협력기구(SCO) 플러스 정상회의에서 ‘글로벌 거버넌스 이니셔티브(GGI)’를 제안했다. 이는 글로벌 개발(GDI), 글로벌 안보(GSI), 글로벌 문명(GCI)에 이은 네 번째 글로벌 패키지로, 중국이 처음으로 국제 규범의 ‘설계자’를 자처하며 제도적 리더십을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GGI는 표면적으로 ‘공정하고 포용적인 글로벌 거버넌스 체계’를 내세우지만, 그 핵심은 기존 서방 주도의 질서에 대한 대안 제시다. 시진핑 주석은 SCO 연설에서 “모든 국가는 국제질서의 동등한 참여자이자 의사 결정자”라고 강조하며, 미국 중심의 불평등한 체제와 제재 남용, 세계무역기구(WTO) 기능 마비, 지속가능발전목표(SDG) 이행 지연 등 서구의 실패를 비판했다.
GGI는 이러한 문제의식 위에 ‘주권평등, 국제법 존중, 다자주의, 인간 중심, 실질 행동’의 5대 원칙을 내세우며, 서방이 독점해온 국제 담론의 재(再)정의를 시도한다.
과거 일대일로(BRI)가 인프라와 물류를 매개로 한 ‘공급망 영향력 전략’이었다면, GGI는 규범·표준·제도를 통한 ‘질서 경쟁 프로젝트’다. 중국은 이를 통해 글로벌사우스 국가와 연대를 강화하고, 유엔·브릭스·SCO·G77+중국 등 다층적 네트워크를 결합해 자국 중심의 제도 생태계를 구축하려 한다. 이른바 공급망에서 규칙망으로의 전환이다.
중국식 국제질서 만들겠다는 선언
중국이 이런 구상을 제시할 수 있는 배경에는 세계 최대의 제조 기반, 인공지능(AI) 전기차 청정에너지 등 신산업 주도력, 막대한 외환보유와 개발금융 동원력, 그리고 중앙집권적 정책 추진력이 있다. 여기에 일대일로,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브릭스 확대로 축적된 제도 운영 경험이 결합된다. 그러나 제약도 많다. 경제성장 둔화, 기술견제, 공급망 탈중국화, 대외신뢰의 취약성, 주변국의 경계심 등은 GGI 확산의 구조적 한계로 작용한다.
그래서 GGI는 당장 세계질서를 바꾸는 틀이라기 보다는 중장기적으로 국제담론을 재편하고 개도국의 지지를 결집하는 플랫폼으로 기능할 가능성이 크다. 중국은 ‘힘의 경쟁’에서 ‘정당성 경쟁’으로 전선을 확장하려 한다. GGI 등장은 미중 경쟁이 군사력과 기술력의 영역을 넘어 제도·규범 경쟁 단계로 진입했음을 의미한다.
미국은 경제안보 동맹 연대를 강화하고, 중국은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SCO·브릭스를 통해 영향권을 확장하고 있다. 세계가 ‘힘의 경쟁’을 넘어 ‘규범 경쟁’ 시대로 이동하는 상황임에도 한국은 여전히 미중 전략경쟁의 최전선에 있다. GGI가 본격 가동되면 동아시아는 기술·표준·금융·디지털 규범을 둘러싼 대결과 선택의 시대를 맞게 될 것이다.
중국의 GGI 공세는 한국 외교에 딜레마다. 배제도 전면수용도 현실적이지 않다. 이념보다 전략, 정서보다 실용이 해답이다. 그래서 ‘전략적 양자 균형’과 ‘선택적·조건부 협력’ 원칙을 정립할 필요가 있다. 한국은 세계 10위권 경제력과 5위 신흥 기술력(CET Index)을 보유한 중견국으로서 장기적인 설계가 중요하다. 한미동맹을 전략적 기반으로 하되, 중국과 실용협력을 병행해야 한다.
GGI 내에서 한국이 협력할 수 있는 영역은 넓다. △재생에너지 배터리 수소 등 녹색산업 공동 프로젝트, △AI 핀테크 디지털무역 인증 등 기술규범 협력, △한국 중소기업의 중국시장 디지털 진출 지원, △보건 기후변화 식량안보 등 비핵심 전략 분야가 모두 가능하다. 물론 반도체 양자 국방기술 등 민감한 영역은 배제해야 하고, 국제표준과 투명성 보장이라는 전제조건이 필요하다.
선택적 참여와 선제적인 설계 필요
이처럼 한국에게 GGI는 양면성을 갖는다. 기회인가 리스크인가? 양쪽을 놓고 어떻게 균형점을 찾느냐가 대중 외교의 성패를 좌우할 것이다. 이분법으로 접근할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한국이 어떤 레버리지를 창출할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 국제표준화와 규범 경쟁의 무대에서 한국의 기술력과 제도 설계 역량은 중요한 전략 자산이 될 수 있다. 새로운 질서의 수용자가 될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규범 설계의 참여자가 될 것인가?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분명하다. 선택은 배타가 아니라 설계이며, 배제보다는 레버리지다. 지금 필요한 것은 원칙 있는 실용외교, 선택적 참여, 그리고 선제적 리스크 관리다. 외교적 지혜와 균형감각이 국가의 미래공간을 결정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