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시평
실패 포용하는 국가 R&D 시스템을
2023년 과학기술계를 뒤흔든 ‘카르텔 논쟁’의 불씨는 “성공률 98% R&D 과제에 나눠주기식 예산”이라는 지적에서 시작됐다. 경기침체 속에서 매년 30조원에 달하는 연구개발 예산이 ‘성공률 높은 쉬운 과제’에 나눠주는 구조로 비추어지자 과학기술계는 비효율의 상징처럼 낙인찍혔다. 그러나 ‘98% 과제 성공률’은 사실과 다르다. 정부 R&D 평가는 단순한 성공과 실패의 이분법이 아니다. 2019년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의 ‘국가 R&D 과제평가 표준지침' 개정 이후 정부 R&D 평가는 ‘우수-보통-미흡-극히 불량’의 4단계로 운영된다.
여기서 목표를 완전히 달성하지 못하더라도 연구를 성실히 수행하면 ‘성실수행’으로 인정된다. 출처와 근거가 불분명한 ‘98%’ 숫자의 의미를 부여한다면 바로 이 성실히 수행된 과제의 비율로 해석될 수 있다. 즉 결과의 완성도가 아니라 과정의 충실도를 말한다. 이 수치가 ‘연구자들이 쉬운 과제만 한다’는 프레임으로 왜곡되면서 연구의 본질을 가리는 착시가 시작된 것이다.
‘R&D 성공률 98%’ 실패 용납하지 않는 제도가 만든 구조적 착시
과학기술 연구는 본질적으로 성공으로만 재단할 수 없는 도전과 실패의 연속이다. 실패 속에서 지식이 축적되고, 그 축적 위에서 비로소 혁신이 탄생한다. 그럼에도 우리 R&D 제도는 여전히 단기성과 중심의 평가를 중요시한다. “성과를 빨리 내지 못하면 다음 과제에서 탈락한다”는 불안이 연구현장을 지배할 경우 연구자는 도전보다 생존을 택한다. ‘98% 성공률’은 연구자의 안일함이 아니라 실패를 용납하지 않는 제도가 만든 구조적 착시다.
혁신은 실패를 용인할 때 싹튼다. 모더나의 mRNA 백신 개발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 초기에 mRNA 백신은 면역 부작용과 낮은 전달효율로 번번이 실패했지만 모더나는 이 실패를 발판으로 mRNA 염기서열 엔지니어링과 인공 RNA 기술, 나노입자 전달체(LNP)를 결합하는 혁신을 완성했다. 30년에 걸친 기초연구의 축적과 학제 간 팀사이언스, 그리고 이를 뒷받침한 인내자본(patient capital)이 있었기에 코로나19 팬데믹 속에서도 불과 11개월 만에 백신을 개발할 수 있었다.
우리의 R&D 정책도 이런 관점의 전환이 필요하다. 과학기술 투자의 본질은 단기 효율이 아니라 장기신뢰다. 도전적 연구는 실패 가능성이 높고 회수기간이 길기 때문에 민간이 감당하기 어렵다. 정부는 단기성과에 매몰되지 않고 연구자가 안심하고 실패를 감내하며 도전을 지속할 수 있는 제도를 설계해야 한다. 실패를 낭비로만 보지 않고 축적되는 지식의 자산으로 인정하는 문화가 필요하다. 최근 정부가 “연구자에게 실패할 자유와 권리를 주겠다”고 밝힌 것도 이런 맥락에서 주목할 만하다. 특히 기초연구는 다양성과 축적이 생명이다. 다양한 소액 연구가 폭넓은 저변을 형성하고 그 토대 위에서 수월성이 자란다. 이를 ‘뿌려주고 나눠먹기식 연구’로 치부하는 순간 과학기술 혁신의 토양은 메말라간다. 모더나의 성공도 기초과학 나노의학 산업기술이 오랜 시간 융합된 결과였다. 실패의 반복과 긴 호흡의 신뢰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과학기술 투자의 본질은 단기효율이 아니라 장기신뢰
가장 중요한 쟁점은 예산 효율성이 아니라, 과학기술의 신뢰를 어디에 둘 것인가의 문제다. 모소대나무는 5년 동안 땅속에서 뿌리를 확장한 뒤 단숨에 30m까지 자란다. 지금의 R&D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 뿌리를 키우고 있다. 과학기술의 진정한 가치는 눈앞의 가시적인 성과에 앞서, 보이지 않는 뿌리를 믿고 기다리는 인내에서 비롯된다. 최근 다시 제기된 ‘성공률 논쟁’은 과학기술 발전의 본질과는 거리가 멀다. 과학기술부총리 체제가 새로 출범하는 이 시점에 숫자 논쟁으로 출발선을 흐리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지금 필요한 것은 선도적 R&D를 위해 실패를 포용하는 국가 연구 시스템의 강화다. 그 믿음 위에서만 한국의 과학기술은 다시 한번 도약할 수 있다.
전 과학기술인공제회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