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수막 표현 바꿔 또 게시 “별개 범죄”
대법, ‘이중기소’ 공소 기각한 하급심 파기
“범행 간격·동기 등 비춰 ‘하나의 죄’ 아냐”
특정 회사 명예훼손 혐의가 인정돼 법원으로부터 현수막 게시를 금지하는 가처분 결정을 받은 이후 표현을 바꿔 유사한 현수막을 다시 게시했다면 별개 범죄로 보고 처벌해야 한다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첫 범행 후 새로운 범죄 의도를 갖고 비슷한 죄를 저질렀다면 포괄일죄(여러 행위가 포괄적으로 하나의 죄를 이루는 경우)에 따른 ‘이중 기소’로 볼 수 없다는 취지다.
24일 법조계에 따르면 대법원 3부(주심 이흥구 대법관)는 최근 명예훼손 및 옥외광고물등의 관리와 옥외광고산업진흥에 관한 법률(옥외광고물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A씨의 상고심에서 공소기각 판결한 원심을 파기하고 사건을 서울중앙지방법원에 돌려보냈다.
A씨는 2017년 12월~2018년 1월 서울 서초구 하이트진로 사옥 앞에서 회사 명예를 훼손하는 현수막을 건 혐의(명예훼손, 옥외광고물법 위반)로 기소돼 2021년 10월 대법원에서 벌금 500만원이 확정됐다.
A씨는 해당 재판이 진행 중이던 2018년 4월~2019년 6월 유사한 내용의 현수막을 재차 게시해 2019년 11월 또다시 재판에 넘겨졌다.
쟁점은 A씨가 법원으로부터 가처분 결정을 받은 이후 문구를 바꿔 다시 유사한 범행을 저질렀는데, 이를 포괄일죄로 볼 수 있는지 여부였다.
1심은 2021년 8월 이 사건과 선행 사건의 공소사실을 포괄일죄로 보고 공소를 기각했다.
동일한 장소에서 동일한 방법으로 하이트진로에 대한 허위사실을 적시한 행위는 단일하고 계속된 범의(범행의도) 아래 이뤄진 여러 행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검사가 포괄일죄를 구성하는 일부 범죄사실을 기소한 뒤 그 판결 선고 전까지 나머지 범죄사실을 별개의 독립된 범죄로 기소하는 것은 ‘동일 사건에 대한 이중기소’여서 허용되지 않는다는 게 판례다.
선행 사건 1심 선고는 2020년 8월에 있었는데, 검사가 이 사건 기소일인 2019년 11월 별도 기소할 게 아니라 앞선 재판 중 공소사실을 추가하는 취지로 공소장 변경 신청을 해야 했다는 게 1심 판단이었다.
검사가 항소했으나 2심 재판부도 1심 판단이 맞는다고 보고 항소를 기각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선행 사건과 기소된 사건 사이에 범죄 의도의 갱신이 이뤄졌다고 보고 포괄일죄로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대법원은 “법원의 가처분 결정에 따라 피고인이 선행 현수막을 수거함으로써 피고인의 범행이 일시나마 중단되었고, 피고인은 위 가처분 결정에 따른 제재를 회피하기 위해 선행 현수막의 표현과는 다소 다른 내용의 이 사건 각 현수막을 새로 게시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했다.
대법원은 “선행 사건 공소사실과 이 사건 공소사실 사이에는 범의의 갱신이 있었다고 할 것이므로, 선행 사건 공소사실과 이 사건 공소사실은 포괄일죄로 볼 수 없다”며 “원심의 판단에는 포괄일죄에 관한 법리를 오해한 잘못이 있다”고 했다.
대법원은 “아울러 공소사실 중 공소제기 범위가 어디까지인지를 확인하고 불분명한 부분은 검사에게 석명을 구하는 등으로 명확하게 한 다음 기소된 범위에서 심리·판단할 필요가 있음을 지적해둔다”고 덧붙였다.
김선일 기자 sikim@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