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카이치 경제, 일본판 ‘트러스쇼크’ 우려
대규모 추경·감세정책, 엔화·채권 가격 급락 … 초장기 국채금리, 한국 중국보다 높아
지난달 26일 일본 국회에서 자민당 총재인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와 야당 대표간 ‘당수 토론’이 열렸다. 제1야당 대표인 노다 요시히코 입헌민주당 대표는 “(총리 취임이후) 엔화가치와 국채가격의 약세가 시작됐다”며 “2022년 영국의 ‘트러스쇼크’와 같다”고 지적했다.
일본 엔화는 최근 달러당 157엔대까지 상승했다. 다카이치가 자민당 총재에 당선된 이후 달러당 10엔이나 급등했다. 10년물 국채금리도 1.815%까지 치솟아 중국 국채 금리를 웃돌았다. 초장기 채권인 40년물은 3.745%로 역대 최고 수준을 보였다.
어떻게 시장을 안정시킬까
2022년 9월 당시 리즈 트러스 영국 총리는 취임과 함께 대규모 감세안을 발표해 금융시장에 충격을 줬다. ‘과거 50년내 최대’ 규모의 감세안은 영국 파운드화 폭락과 채권금리 폭등으로 이어져 금융시장 발작을 불러왔다. 이른바 ‘트러스쇼크’로 불리는 금융시장 혼란으로 트러스는 취임 44일 만에 불명예 퇴임하면서 영국 역사상 가장 단명 총리로 기록됐다.
최근 일본 정치권과 금융시장에서 ‘트러스쇼크’라는 말이 자주 거론된다. 노다 대표는 ‘당수 토론’에서 금융시장 동향을 거론하면서 “다카이치 정권의 경제대책은 지나치게 방만한 재정으로 시장이 경종을 울리고 있다”며 “총리는 평소 영국의 대처 수상을 목표로 한다고 했지만 트러스 총리처럼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고 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지난 29일 '어떻게 시장을 안정시킬 것인가'라면서 정부의 금융시장 혼란을 막기 위한 대책을 주문했다. 구체적으로 △일본은행의 금리인상을 무리하게 막지 말 것 △수요자극형 재정지출에 매달리지 말 것 △국채발행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일 것 등을 주문했다. 이러한 대응만이 ‘다카이치쇼크’를 피할 수 있는 길이라고 분석했다.
마쓰자와 나카 노무라증권 수석전략가는 최근 채권금리 급등은 국채금리 ‘기간 프리미엄’과 ‘국채와 스와프금리의 차이’ 등을 통해 추정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특히 30년물과 10년물의 금리 격차가 1.50% 이상 벌어지면서 향후 인플레이션에 대한 시장의 우려가 반영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여기에 스와프금리의 차이에 따른 국채 수요의 불안정성은 향후 국채금리 상승의 상방압력이 강하다는 분석이다.
마쓰자와 수석은 “이러한 분석을 토대로 최근 10년물 금리의 상승은 일본은행의 금리인상이 생각보다 큰폭이 될 것이라는 관측을 뒷받침한다”며 “시장이 점치는 정책금리의 종착점은 국채 10년물 금리 상승과 궤를 같이한다”고 했다.
일본은행은 현재 일본 경제에 적합한 중립금리는 1.0~2.5% 사이의 어느 수준일 것으로 추산한다. 따라서 일본은행의 정책금리 종착점은 그 중간쯤인 1.50% 이상이 될 수도 있다는 의미다. 현재 일본은행 정책금리가 연 0.50%인 점을 고려하면 상방압력이 강하다. 일본 금융시장에서는 일본은행 정책금리가 내년 하반기까지 1.0% 수준에 이를 것으로 예상한다.
일본은행, 12월 금리인상 단행할까
교도통신은 29일 “일본은행이 외환시장에서 급속하게 진행되는 엔저에 따른 물가 급등을 경계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이달 18~19일 열리는 일본은행 금융정책결정회의에서 정책금리 인상을 결정할 것이라는 시장의 전망이 확산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금리인상이 늦어지는 상황에서 인플레이션 위험성을 방치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이에 따라 기간프리미엄과 스와프금리와 차이는 올해 4월 이후 갈수록 확대하고 있다. 이처럼 장기간 금리 차이가 벌어진 것은 아베노믹스 초기와 비슷한 수준이다.
하지만 재정과 금융을 동시에 풀었던 아베노믹스 때와는 일본 거시경제와 금융시장 여건이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평가다. 장기 디플레이션 국면이었던 당시와 달리 지금은 인플레이션 상황이다. 재정확장으로 수요를 자극하고 금융완화를 지속할 경우 인플레이션 경계로 인해 장기금리의 상승으로 이어져 거시경제와 금융시장에 혼란을 일으킬 수 있다는 관측이다.
이에 앞서 다카이치 총리와 우에다 가즈오 일본은행 총재는 지난달 18일 첫 회담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우에다 총재는 지난해부터 지속한 금융정책 정상화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인플레율 2%대가 지속적 안정적으로 유지되도록 서서히 금융완화의 정도를 조정해야 한다”고 했다. 금리인상의 필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한편 일본 국채 수급 악화에 대한 우려도 확산하고 있다. 이미 일본은행이 지난해 8월부터 국채매입을 분기마다 4000억엔(약 3조7600억원)씩 줄여 가는 이른바 ‘일본판 양적완화 축소’ 국면이 이어지면서 금리상승은 더 가팔라질 수 있다는 관측이다.
마쓰자와 수석전략가는 “해외세력의 일본 국채시장 이탈 등에 따라 수급이 본격적으로 악화하면 금리 상방압력이 더욱 확대할 여지가 있다”고 했다. 또 다른 채권시장 관계자도 “만약 다카이치 정권이 내년도 예산 편성에서 초장기 채권의 수급을 배려하지 않고 국채발행을 급격히 늘리면 해외 투자자의 국채 매도를 불러올 수 있다”라고 했다.
다만 일본과 영국의 금융시장을 둘러싼 상황은 달라 ‘일본판 트러스쇼크’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도 있다. 시라키 히사후미 미쓰이스미토모증권 수석전략가는 “만성적인 경상수지 적자와 함께 국채의 30% 이상을 보유한 해외투자자의 영향력이 강한 영국과 일본은 다르다”고 말했다. 실제로 일본은 해마다 2000억달러 가까운 경상수지 흑자를 내고 있고, 일본 국채 보유 비중도 일본은행(51%)과 일본내 은행 및 보험사(31%) 등이 갖고 있다.
자민당 내부서도 우려
다카이치 내각은 지난 28일 추경예산안을 결정했다. 일반회계 세출은 경제대책 17조7028억엔과 기타 비용을 합쳐 총액 18조3034억엔(약 172조원)규모이다. 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신규로 국채 11조6960억엔(약 110조원)을 발행하기로 했다.
올해 말 기준 일본 국채발행 잔액은 1229조엔(약 1경1550조원)으로 증가할 전망이다. 국제통화기금(IMF) 집계에 따르면 일본의 국가채무는 지난해 말 기준 명목 GDP의 236.1%로 미국과 유럽에 비해 압도적이다.
확장재정과 국채발행 급증에 대한 우려는 시장에서 나타나고 있다. 지난달 28일 재무성이 시행한 40년물 국채 입찰에서 최고 낙찰금리는 3.555%로 2007년 40년물 발행시작 이후 최고치를 보였다. 국채 수요가 약해졌음을 보여준다. 유통시장에서도 40년물은 지난달 20일 3.745%로 역대 최고치를 보였다. 30년물도 이날 최고를 기록했다. 일본 국채 30년물과 40년물 금리 수준은 한국과 중국의 초장기채 금리보다 높다.
채권가격의 하락은 보유 주체의 대규모 손실로 이어지고 있다. 일본 국채의 50% 이상을 보유한 일본은행의 국채 평가손실 금액만 32조8285억엔(약 310조원)에 이른다. 손실 규모는 지난해 동기에 비해 13조6604억엔 증가했다. 다만 일본은행은 국채를 만기까지 보유하기 때문에 실제 손실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민간 금융회사는 다르다. 일본내 대형 4개 보험사의 올해 9월 말 기준 채권 평가손실 금액이 11조3000억엔(약 106조원)에 이른다. 6월 말 대비 1분기 만에 1조4500억엔(약 13조6300억원) 늘었다. 채권 매각에 따른 확정된 손실만 1조엔(약 9조4000억원)을 넘는다. 민간 보험사가 보유한 해외 채권 등을 모두 포함한 금액이지만 일본 국채가격 하락에 따른 손실은 불가피하다는 분석이다.
한편 다카이치 내각의 재정확장 정책에 대한 우려는 집권 자민당 내부에도 있다. 아소 다로 전 총리 등 당내 재정규율파의 목소리가 일단 잠복해 있지만 내각 지지율이 하락하면 당내 노선대립으로 나타날 수 있다고 니혼게이자이신문은 분석했다.
실제로 다카이치 총리 당선에 결정적 후견인 역할을 했던 아소 전 총리는 최근 주변 측근들에게 “(재정확장 정도가)지나치지 않은가”라는 우려를 표했다는 후문이다. 지금과 같은 속도와 규모로 재정과 국채발행을 늘릴 경우 발생할 부정적 영향에 대한 우려는 당내 광범위하다. 한 전직 고위관료 출신 당내 인사는 “코로나19 이후 재정에 대한 감각이 바뀌었다”며 “평상시에도 10조엔을 넘는 추경안이 당연한 것처럼 됐다”고 우려했다. 코로나19 직전인 2019년 추경안 규모는 3조엔 수준에 그쳤다.
백만호 기자 hopebaik@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