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인플레·전쟁 위험 줄일 ‘금의 귀환’
미국 유럽이 금 보유 60% 독과점 … 중국 인도 최근 대량 매집 ‘탈달러화’
인플레이션 우려와 통화 불안, 지정학적 위기(전쟁)가 겹치면서 ‘가장 오래된 안전자산’인 금이 국제 경제시장에서 다시 조명받고 있다.
인공지능(AI)·데이터경제로 전환되는 시기일수록 실물 기반의 자산 중요성이 커지는 것도 금의 역할을 공고히 한다.
금은 실물자산 중에서도 부식되지 않고 대체 불가능한 희소성을 갖고 있으며, 통화 시스템이 흔들릴 때마다 세계 각국의 중앙은행이 찾는 신뢰의 수단이다. 최근 5년간 주요국들의 금 보유량은 증가하고 있으며, 특히 신흥 경제권의 매수세가 눈에 띈다.
◆불확실성 시대 안전한 실물자산 = 2일 투자전문 온라인플랫폼 ‘불리언볼트’(BullionVault)에 따르면 2024년 기준 세계에서 가장 많은 금을 보유한 국가는 미국이다.
미국은 8134톤의 금을 보유했으며, 2위 독일(3352톤)보다 2배 이상 많은 규모다. 미국의 금 보유량은 수십년간 거의 변함이 없을 정도로 안정적이며, 대부분은 켄터키주의 포트 녹스와 뉴욕 연방준비은행에 보관돼 있다.
유럽의 전통적 경제 강국들도 금 보유에 적극적이다. 독일(3352톤) 이탈리아(2452톤) 프랑스(2437톤)를 합치면 8200톤 수준으로, 미국 전체 보유량에 비견된다.
이들 국가의 대규모 보유는 2차 세계대전 이후 브레튼우즈 체제에서 금이 국제통화의 기준이었던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금은 전쟁·사상적 충돌·통화위기를 겪는 동안 ‘국가 신뢰의 마지막 수단’이 됐다.
신흥국의 금 축적 속도는 더 가파르다. 중국의 금 보유량은 2019년 1948톤에서 2024년 2280톤으로 급증했다. 5년 동안 331톤을 추가했다. 경제전문가들은 “중국의 이러한 금 보유 전략은 단순히 금융자산 확대를 넘어 ‘탈달러 전략’과 연결된다”고 분석한다.
중국정부는 미국 국채 보유량을 줄이고 금을 늘려 국제 결제 구조를 다변화하려는 움직임이다. 장기적으로는 위안화의 국제 결제 통화화를 추진하고, 금융제재 리스크를 줄이려는 의도로 관측된다.
인도 역시 876톤의 금을 보유하며 세계 9위다. 인도는 역사적으로 금을 종교적·문화적 가치 저장 수단으로 인식해 왔으며, 경제가 성장할수록 중앙은행의 공식 보유량도 늘고 있다.
폴란드(448톤) 튀르키예(595톤) 등 신흥국의 매수세도 두드러진다. 폴란드와 튀르키예는 2019~2024년 동안 각각 220톤, 216톤을 추가했다.
폴란드는 높은 인플레이션과 유로존 금융 불안 속에서 외환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한 조치로 해석된다. 튀르키예는 자국 통화 가치가 급락하고 외환보유액이 불안정해지자 금을 대외 결제 및 내부 신뢰 방어 자산으로 축적했다.
◆한국 금 보유량은 세계 37위 = 중앙아시아·중동 자원국가들의 움직임도 주목된다. 우즈베키스탄(383톤) 사우디아라비아(323톤)는 에너지 수익이 풍부함에도 달러 의존 위험을 감소시키려 금을 확대하고 있다.
카타르(69톤) 태국(81톤) 싱가포르(93톤) 등 금융 안정국 역시 글로벌 충격에 대비해 금을 축적한다. 한국은 104톤으로 세계 37위에 머물며, 선진국 대비 낮은 수준이다.
한국의 금 보유량이 적은 것은 외환시스템이 달러 중심인데서 비롯된다. 수출 수입 유통결제의 대부분이 달러 기반이다. 또 유동성을 선호하는 개방경제를 지향하다보니 단기 대응력이 떨어지는 금 보유에 적극적이지 않다.
한편 2024년 기준 미국과 유럽은 전 세계 금 보유량의 60% 이상을 보유하고 있다. 이는 국제 통화 질서의 기본 틀이 여전히 서구 국가 중심임을 보여준다.
하지만 금 보유 증가 속도는 신흥국이 앞서고 있다. 중국·인도·폴란드·튀르키예는 최근 5년간 세계에서 가장 많이 금을 사들인 국가다. 이는 달러 패권 약화, 글로벌 공급망 재편, 지정학적 블록화가 심화하면서 금이 외환·통화 정책의 핵심 수단으로 부활했음을 시사한다.
금 보유 확대는 단순한 경제 전략이 아니라 국가 안보 전략으로도 통한다. 금은 디지털 자산과 달리 해킹될 수 없고, 제재 대상이 되지 않으며, 국제 정치적 대립에서도 실물로 가치가 남는다. 특히 AI·데이터 경제로 전환되는 시대일수록 금의 역할을 간과할 수 없다.
AI·데이터경제는 고위험·고변동·무형이다. 반면 금은 역사적·물리적·정치적으로 가장 안전한 가치 저장 수단으로 꼽힌다.
국내 자산운용사 관계자는 “AI는 에너지(전력) 강화 산업이고, 전력비 상승과 공급망 불안은 자본을 실물 안전자산으로 이동시키는 압력으로 작용한다”며 “기술 불확실성이 커질수록 물리적 희소성있는 자산이 강해지는 구조”라고 말했다.
이재호 기자 jhlee@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