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교육청, AI 시대 민주시민교육 대전환 … 헌법·자치·평화교육 전면 강화
헌법 유린 1년…학교에서 시작된 민주주의 교육
2024년 12월 3일, 윤석열 대통령의 불법 비상계엄으로 헌법 질서가 무너졌던 그날을 많은 시민은 생생히 기억한다. 민주주의의 최소한 규범마저 흔들린 경험은 “왜 헌법교육이 필요한가”라는 질문에 새로운 무게를 더했다. 학교 교육이 더 이상 지식을 전달하는 데 그칠 수 없으며 헌정 질서를 지키는 시민을 길러내는 일임을 확인한 순간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최근 서울의 한 고등학교에서 벌어진 장면은 교육이 어떻게 현실과 맞닿아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학생들은 지역의 학도병 역사를 조사하며 “영웅화된 기억 뒤에 숨은 전쟁의 참혹함을 직시해야 한다”고 문제를 제기했고 평화의 의미를 전하는 조형물 설치를 지역사회에 제안했다. 주민 서명을 받는 과정에서 학생들은 “지역 문제를 바꾸는 일이 어른들만의 몫은 아니다”라며 직접 참여했다. 전쟁 경험이 점점 희미해지는 시대에 오히려 학생들이 먼저 평화의 가치를 공론장으로 끌어올린 셈이다.
서울시교육청이 내놓은 ‘AI 시대 민주시민교육’은 이 같은 현장 움직임을 교육정책 전반으로 확장하는 시도다. 디지털 전환, 정치적 갈등, 허위 정보 확산 등 변화된 환경 속에서 학교가 길러야 할 시민성의 내용을 새로 정리한 것이다.
◆“수업이 달라졌다”… 난우중 헌법 수업에 드러난 변화 = 12월 3일을 앞둔 지난 1일, 서울 난우중학교 3학년 교실에서는 ‘새로운 시대에 필요한 기본권’을 주제로 한 헌법 수업이 진행됐다. 학생들은 1987년 개헌 과정과 직선제 도입, 표현의 자유 확대 등 국민의 기본권이 확장돼 온 흐름을 살핀 뒤 지금 사회가 직면한 쟁점을 놓고 모둠 토론에 들어갔다.
“기후 위기 시대에는 자연의 권리를 헌법에 명시해야 해요.”
“가짜 정보로부터 안전하게 보호받을 디지털 기본권이 필요합니다.”
“겨울에 치마 착용이 의무인 학교도 있어요. 안전하고 존중받으며 배울 권리를 헌법에 넣어야 합니다.”
학생들의 발언은 조심스럽지만 명확했다.
정근식 서울시교육감과 최교진 교육부 장관이 교실 한가운데에서 토론을 함께 지켜보자 질문은 더욱 다양해졌다.
“학생 인권과 교권은 충돌하는 관계인가요?”
“학생 인권조례 폐지 논란을 보면서 우리가 지켜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 헷갈립니다.”
정 교육감은 “인권과 교권은 서로를 지키며 발현되는 가치”라고 답했고 학생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수업을 지켜본 한 교사는 “민주시민교육이 교과 지식이 아니라 학생의 토론과 참여에서 시작된다는 걸 다시 확인한 시간”이라고 말했다.
◆AI 시대의 시민성 … 디지털 리터러시에서 공동체 책임까지 = 서울시교육청은 디지털 환경에서 책임 있는 시민성을 기르기 위한 기반 마련에 속도를 내고 있다. 우선 교사들이 함께 수업을 연구하는 학습공동체 네트워크를 넓히고 교실에 투입될 전문 인력풀을 확충한다는 계획이다. 학교 현장에서 나온 우수사례는 아카이브로 정리해 공유하고 가정–학교가 연계할 수 있는 교육자료도 함께 배포한다. AI 편향, 온라인 혐오, 가짜정보 확산 등 디지털 시대의 위험을 학생 스스로 판단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핵심 목표다.
올해부터 운영되는 온라인 역사교육자료센터에는 사실에 근거한 자료를 꾸준히 올린다. 단순한 자료 축적을 넘어 균형 잡힌 역사교육을 위한 사회현안 주제와 다양한 논거도 함께 담을 예정이다. 한국언론진흥재단과 협력해 운영 중인 ‘팩트체크 교실’ 역시 같은 취지에서 추진된다. 교원 연수와 학생 수업을 연계해 운영하고 있으며 자유학기제 활동과 결합도 확대하고 있다.
서울시교육청은 “디지털 공간에서 책임 있는 판단을 할 수 있는 시민성을 키우는 것이 교육이 가야 할 방향”이라고 강조했다.
◆학교에서 민주주의를 ‘경험하도록’ … 학생 자치 전면 확대 = 민주시민교육은 학생자치에서 가장 뚜렷하게 드러난다. 서울시교육청은 ‘학생을 학교 운영의 당사자’로 보는 기조 아래 학생자치 정책을 대폭 확대하고 있다. 우선, 모든 초·중·고에 ‘학생자치참여예산’이 편성돼 운영되고 있다. 학교 전체 예산 중 학생들이 직접 기획·운영할 수 있는 유일한 예산이다. 학생들은 동아리 활동과 학교 개선 사업 등을 스스로 설계하면서 “우리 손으로 학교를 바꿀 수 있다”는 자부심을 갖고 자치의 경험을 쌓고 있다.
학생대표 선출 방식도 바뀌었다. 예전에는 학교장이 당선인에게 임명장을 주는 방식이었다면, 지금은 학생들로 구성된 선거관리위원회가 당선증을 수여하는 제도가 자리 잡았다. 이런 변화로 학생회 선출 과정의 책임성과 상징성이 크게 강화됐다. 2024년 전체 학교의 23%에 그쳤던 당선증 수여는 2025년 현재 78%로 확대됐다.
학생참여선순환체제도 대부분의 학교에서 정착했다. 학급회의, 학생회, 학교장 간담회로 이어지는 구조로 학생 의견을 수렴하고 피드백을 투명하게 공개하는 제도다. 학교장은 학생대표와의 정례회를 통해 다양한 의견을 듣고 학교 운영에 반영하고 있다. 또한 학교운영위원회 주요 안건인 학교 헌장, 학칙 제·개정, 방과후·방학 중 교육활동, 수련활동, 급식, 학생 관련 예산 심의 등에 학생 대표가 참석해 의견을 제시할 수 있도록 제도화를 추진 중이다.
학생자치는 지역사회로도 확장되고 있다. 교육지원청 단위의 학생참여위원회에는 서울 지역 중·고등학교 학생회장 717명이 참여하고, 이 가운데 지원청별 대표위원 44명이 네트워크를 구성해 ‘서울학생참여위원회’를 운영한다. 이들은 교육감과 연 2회 이상 간담회를 갖고 올해는 국회 교육위원장과도 만났다. 학생들이 제출한 정책이 실제 행정에 반영되는 ‘정책 환류 체계’도 활발하다. 더 나아가 지역사회 참여도 늘고 있다. 최근 학도병 조형물 설치처럼 학생들이 지역의 과거·현재 문제를 조사해 해결 방안을 제시하는 ‘사회 현안 프로젝트’가 대표적이다.
한 중학교 교사는 “지역의 문제를 인식하고 해결 과정을 경험하는 것이 시민이 되는 과정”이라고 말했다. 학생들이 지역 의제를 공론장으로 끌어올리는 사례가 늘면서 교육청도 지원을 강화하고 있다.
◆ 토론 문화 혁신 … ‘한국형 보이텔스바흐 원칙’ 공표 = 서울시교육청은 디지털 시대 갈등이 심화하는 현실을 반영해 지난해 말 ‘한국형 보이텔스바흐 원칙’을 공식 발표했다. 민주적 기본 질서를 토대로 정치적 중립을 지키고 주입식 수업을 금지한다는 방향을 분명히 한 것이다. 특히 사회적 쟁점의 논쟁성은 있는 그대로 드러내되 보편적 가치를 바탕으로 상대의 관점과 처지를 함께 고려하는 ‘역지사지’ 원칙을 제시한 점이 특징이다.
서울시교육청은 이에 따라 2023~2025년 초·중·고에서 활용할 토론 수업 교재 3종(기본·심화)을 개발·보급했다. 올 하반기에는 초등학생용으로 공감 능력과 사회정서 역량을 강화한 ‘역지사지 공감형’ 토론 교재도 새롭게 배포할 예정이다. 또한 사회현안을 주제로 한 팩트체크 토론과 공존형 대토론회를 지속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서울–경기 학생 토론회에서는 ‘수능 제도를 유지해야 하는가’를 주제로 토론이 진행됐고 '국회와 함께 하는 서울학생 대토론회’도 정례화해서 이어가고 있다.
◆헌법교육의 토대 재정비 … “지식을 넘어 삶으로” = 헌법교육은 민주시민교육의 중심 축이자 올해 서울시교육청이 가장 강조하는 영역이다. 헌법재판연구원과 연계한 교원 직무연수는 2017년부터 꾸준히 이어져 왔으며 현재까지 이 과정을 이수한 교원은 1000여 명에 달한다. 또한 공익 로펌과 협력해 운영하는 ‘변호사가 찾아가는 법률교육’ 역시 매년 50개 고등학교에서 1400여 명의 학생이 참여하고 있으며 누적 참여 인원은 1만2000여 명을 넘어섰다.
2025년 하반기에는 교육 대상을 초등학교까지 확대한다. 헌법교육 전문 강사가 초등학교 90개교에 투입돼 1800명의 학생에게 체험형 헌법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올해 제헌절에는 문형배 전 헌법재판관이 학교 관리자 150명을 대상으로 ‘헌법적 관점으로 교육을 성찰한다’는 제목의 헌법교육 특강을 진행해 편향성 논란을 극복하고 99%의 높은 만족도를 기록했다. 서울시교육청 관계자는 “헌법은 암기해야 할 지식이 아니라 시민의 삶을 떠받치는 질서이며 일상에서 체득해야 할 가치라는 점을 가르치는 것이 핵심”이라고 강조했다.
◆ “깨어 있는 시민이 세상을 만든다” = 독일 퀼른시의 ‘걸림돌(Stolperstein) 프로젝트’는 홀로코스트 희생자의 삶을 기억하기 위해 집 앞 보도블록에 작은 금속판을 박아 넣는 시민 참여형 추모 작업이다. 금속판에는 이런 문구들이 새겨져 있다.
“그가 여기에 살았다.”
“당신의 무관심이 학살을 불렀다.”
“깨어 있는 시민이 세상을 만든다.”
이 문구는 과거의 폭력을 잊지 않으려는 시민적 실천을 상징하며 서울시교육청이 지향하는 민주시민교육의 철학적 배경을 보여준다. ‘기억’은 민주주의의 최소 조건이고 ‘무관심’은 언제든 헌정 질서를 흔들 수 있다는 경고이기도 하다. 헌법이 유린됐던 그날을 다시 떠올리는 지금, 이 문구는 서울의 학교 현장에서 학생들이 배우고 있는 민주시민교육의 의미를 새삼 일깨운다. AI 시대의 빠른 변화 속에서도 학생들은 지역에서 평화를 이야기하고 교실에서 민주주의를 연습하며 헌법을 일상의 언어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서울시교육청이 추진하는 민주시민교육의 방향은 결국 ‘깨어 있는 시민을 길러내는 일’에 맞춰져 있다.
김기수 기자 kskim@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