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아, 창사 80주년…모빌리티 리더 도약
두 차례 부도 등 시련 극복 … 정의선 회장 정체성 새롭게 설계
창립 80주년을 맞은 기아가 숱한 시련과 역경을 극복하며 글로벌 모빌리티 선도 기업으로 도약해 재조명받고 있다.
1944년 12월 경성정공으로 출발한 기아는 두 차례 부도와 자동차 산업 통폐합조치 등 구조적 위기 속에서도 혁신과 도전으로 시장을 확장해 왔다. 특히 2000년대 이후 실적 기반의 성장 전략과 브랜드·디자인 혁신을 결합하며 글로벌 완성차 시장에서 확고한 위치를 확보했다는 평가다.
오토바이와 삼륜차는 당시 한국의 물류·이동 인프라 개선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1960년 첫 부도 이후에도 신차 개발을 지속했고, 1973년 국내 최초 종합자동차공장 소하리공장을 완공했다. 1980년대 자동차 산업 통폐합조치로 승용차 생산이 중단된 상황에서도 봉고를 앞세워 시장을 개척했다. 봉고는 출시 3년 만에 판매 10만대를 돌파하며 기아 경영 안정화의 주력 차종으로 떠올랐다.
1981년 266억원의 순손실을 기록했던 기아는 이듬해인 1982년 39억원 흑자로 전환했고, 1983년 291억원 순이익을 기록하며 회복에 성공했다. 1987년에는 수출전략형 모델 ‘프라이드’를 출시하며 승용차 시장에 복귀했다. 프라이드는 마쓰다의 설계기술과 기아의 생산력, 포드의 글로벌 판매망을 연계한 ‘월드카’로 글로벌 시장에서 의미 있는 성과를 거뒀다.
1990년 사명을 기아자동차로 변경한 뒤 1992년에는 브랜드 최초 고유 모델 세피아, 1993년 세계 최초 도심형 SUV 스포티지를 출시해 기술·디자인 경쟁력을 강화했다.
하지만 1997년 외환위기 속에서 발생한 부도유예라는 초유의 사태를 맞았다. 책임경영 부재, 무리한 확장, 분식회계 등 경영 리스크가 한번에 드러나면서 법정관리로 이어졌다.
이후 1998년 현대그룹의 인수로 기아는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현대·기아간 시너지는 곧 실적으로 이어졌고, 인수 1년 만인 1999년 ‘카렌스·카니발·스포티지’ 등 RV 라인업의 성공으로 흑자 전환에 성공했다. 2000년 2월 법정관리 조기 졸업은 기아의 생존역량을 상징하는 장면이다.
2000년대 기아의 성과는 브랜드 가치 회복과 실적 기반의 글로벌 확장이었다. 정몽구 명예회장의 ‘품질경영’과 정의선 회장의 ‘디자인 경영’이 결합하면서 기아는 글로벌 시장에서 차별적인 브랜드로 자리 잡았다.
정몽구 명예회장은 당시 카니발(미국명 세도나)의 품질을 3시간여 직접 체크하는 등 ‘품질 최우선주의’를 몸소 실천했다.
정의선 회장은 자동차 디자인의 혁신뿐 아니라 조직문화 개선에 이르기까지 기아 고유의 철학과 정체성을 새롭게 설계했다.
2006년 영입한 피터 슈라이어가 이끈 디자인 혁신은 ‘호랑이 코 그릴’로 대표되는 고유 정체성을 확립했고, K 시리즈(2009~)는 세계적 호평을 받으며 글로벌 판매를 견인했다. 슬로바키아·미국 생산거점 구축도 글로벌 공급망 안정화에 기여했다.
최근 기아는 ‘대변혁’을 선언하며 전동화와 미래 모빌리티 중심으로 사업구조를 재편했다.
전기차 EV6·EV9 및 대중형 EV 시리즈(EV3·EV4·EV5) 출시를 통해 전기차 라인업을 확대했고, 목적기반모빌리티(PBV)를 통해 1980년대 봉고가 수행했던 ‘이동의 본질적 가치’를 새로운 시대에 맞게 계승하고 있다.
기아 관계자는 “80여년의 역사를 근간삼아 앞으로도 글로벌 모빌리티 시장에서 이동의 본질적 가치를 구현하고, 혁신에 앞장서겠다”고 말했다.
한편 기아는 5일 경기 용인시 비전스퀘어에서 ‘기아 80주년 기념 행사’를 개최하고, 80년 사사 및 미래 콘셉트카 ‘비전 메타투리스모’를 처음 공개했다. 이날 행사에는 이학영 국회부의장, 김남희 광명시(을) 국회의원, 강기정 광주시장 등 외빈과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 송호성 기아 사장을 비롯한 기아 전·현직 임직원 등 400여명이 참석했다.
정 회장은 “기아의 80년은 한편의 서사처럼 위대한 여정이었다”며 “현대차그룹을 대표해 지난 80년을 기억하며 함께 해온 모든 분께 깊이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이재호 기자 jhlee@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