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는 환경과학 이야기 | 양자생물학 ① 양자 중첩
철새는 어떻게 길을 찾을까…비밀은 ‘양자 나침반’
양자컴퓨팅 양자통신 양자암호…. 양자역학 기술이 미래를 바꿀 혁신으로 주목받는다. 하지만 놀랍게도 자연은 수십억년 전부터 양자역학을 ‘실용화’해왔다. 철새의 눈, 광합성 등 생명은 이미 양자 현상을 일상적으로 활용 중이다. 이른바 양자생물학이다. 내일신문은 자연이 완성한 양자생물학의 비밀을 4회에 걸쳐 소개한다. <편집자 주>편집자>
바야흐로 겨울철새 계절이다. 철새들은 지도나 위치정보시스템(GPS) 등도 없이 수천㎞를 날아 원하는 곳을 찾아간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비결은 눈 속 단백질이 양자역학 원리로 지구 자기장을 감지하기 때문이다.
이 원리의 핵심은 ‘양자 중첩’이라는 현상이다. 양자 중첩은 입자 하나가 여러 상태로 동시에 존재하는 현상이다. 일상 세계에서 동전은 앞면이거나 뒷면이지만, 양자 세계에서는 관측하기 전까지 두 상태가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 마치 동전이 공중에 떠서 계속 회전하며 앞면과 뒷면을 동시에 보여주는 것과 같다. 우리에겐 이른바 ‘슈뢰딩거 고양이’로 알려진다.
8일 국제학술지 ‘네이처(Nature)‘의 논문 ‘철새의 크립토크롬 4(CRY4)의 자기 감응성‘에 따르면, 새 눈 속에 숨겨진 양자역학적 작용 원리가 지구 자기장을 감지하는 생물학적 나침반 역할을 한다. 독일 올덴부르크대학교와 영국 옥스퍼드대학교 공동연구진은 실험실 조건에서 야간에 이동하는 철새인 ‘유럽울새’의 CRY4 단백질이 자기장에 반응한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CRY4 단백질에 청색 레이저를 쬐고 자기장을 가했을 때 빛 흡수도가 변화하는 것을 확인했다. 또한 이동성 철새의 CRY4 단백질이 비이동성 조류인 닭과 비둘기의 CRY4 단백질보다 훨씬 높은 자기장 민감도를 보였다.
이 연구 결과는 두 가지 측면에서 의미가 크다. 첫째, 생명체 활동이 양자역학을 기반으로 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는 점이다. 둘째, 실온에서 작동하는 양자 센서 개발에 영감을 줄 수 있다. 현재 양자컴퓨터는 극저온 환경이 필요하지만, 자연은 약 40억년 진화 과정을 통해 이 문제를 해결했다.
CRY4 단백질은 양자 중첩 원리를 이용한다. 아주 간단히 설명하면 이렇다. 햇빛이 CRY4 단백질을 ‘켜면’ 전자 2개가 쌍을 이룬다. 이 쌍은 ‘A 상태인 동시에 B 상태’라는 양자 특성을 갖는다. 지구 자기장 방향에 따라 A와 B의 비율이 달라진다. 새의 뇌는 이 비율 변화를 읽어 ‘북쪽으로 날고 있구나’ 등을 파악한다. 일종의 ‘화학 나침반’인 셈이다.
실제로 실험실 조건에서 인공 자기장을 조작하면 새의 방향 감각을 혼란스럽게 만든다는 사실은 여러 연구에서 확인된 바 있다. 또한 특정 파장의 빛을 차단하면 새들이 방향을 잃는다. 이는 시각 시스템과 자기 감지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여기서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주변 환경과의 상호작용으로 쉽게 깨지는 특성의 양자 중첩이 생명체의 복잡하고 따뜻한 환경에서 유지된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양자컴퓨터가 절대영도 근처에서만 작동하는 사실과 대조적이다.
그렇다면 철새는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했을까? 답은 CRY4 단백질의 ‘4단 전자 릴레이’ 시스템에 있다. 빛이 들어오면 전자가 중간 지점 4개를 거쳐 순차적으로 이동한다. 마치 릴레이 선수가 바통을 넘기듯이 말이다. 연구진은 CRY4 단백질의 이러한 구조가 양자 상태를 보호하는 환경을 만든다고 판단했다.
1~2단계에서는 극히 짧은 순간만 유지되지만, 3~4단계로 갈수록 점점 안정화된다. 특히 마지막 두 단계는 서로 초고속으로 전자를 주고받으며 일종의 ‘충격 흡수 장치’ 역할을 한다. 이 덕분에 양자 중첩이 체온의 열 때문에 깨지지 않고 살아남는다.
결국 우리는 양자 중첩이라는 미시 세계 현상이 새들의 대륙 횡단 여행을 가능하게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놀랍게도 이것이 유일한 사례가 아니라는 점이다. 광합성이나 효소 반응 등 양자역학과 관련한 생명 현상은 우리가 알지 못할 뿐 훨씬 무궁무진할 수 있다. 약 40억년 진화 과정을 거치면서 자연은 인간보다 먼저 양자 기술을 완성했다. 철새의 눈은 우리가 만들지 못한 ‘실온 작동 양자 센서’인 셈이다.
김아영 기자 aykim@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