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주희 변호사의 이혼소송 이야기 (6)

외도는 끝났지만, 아이의 시간은 계속된다

2025-12-15 13:00:13 게재

이혼소송에서 가장 흔하게 등장하는 파탄 사유는 부정행위이다. 상담 시 의뢰인들은 “이건 절대로 그냥 넘어갈 수 없다”는 결심을 하곤 한다. 그런데 그 결심이 소송의 언어로 번역되는 순간, 종종 가장 먼저 겨눠지는 화살은 ‘아이’를 향한다.

원고인 의뢰인들은 친권·양육권과 관련해 피고를 강하게 비난하며 아래 문장을 꼭 서면에 담아달라고 요청한다.

“바람 핀 사람이 아이를 제대로 교육할 수는 없다.”

“성 역할을 제대로 배울 수 없다.”

어떤 의뢰인은 더 나아가 “유책배우자에게 아이를 아예 보여주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물론 그 마음이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부정행위는 단순히 ‘다른 사람을 만났다’는 사건이 아니라, 배우자의 신뢰를 파괴하고 삶의 기초를 흔드는 경험이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의뢰인은 자기 존엄이 무너지는 감각을 겪는다. 그래서 이혼소송은 종종 ‘권리구제’라는 말로는 다 담기지 않는 ‘감정의 전쟁’이 된다.

그러나 법정에서 친권·양육권은 ‘누가 더 옳은가’의 문제가 아니다. 부부관계가 파탄에 이르렀다 해도, 아이에게는 여전히 부모가 둘이다. 법원이 가장 중요하게 보는 지점은 부모의 도덕성 자체가 아니라, 아이의 현재와 미래에 어떤 양육 환경이 가장 이익이 되는지다. 단순히 외도가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양육권이 자동으로 박탈되거나 면접교섭이 끊어지는 일은 없다.

나는 때로는 원고를 대리하지만, 또 어떤 사건에서는 유책배우자인 피고를 대리하기도 한다. 유책배우자 측을 대리할 때면 나는 이렇게 말하곤 한다.

“이혼소송은 부부관계를 단절시키는 절차이지, 부모와 자녀의 관계를 단절시키는 소송은 아닙니다.”

부정행위가 혼인파탄의 중요한 사유가 될 수는 있지만, 그것이 곧바로 부모로서의 자격 상실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부부의 갈등을 아이에게까지 전가하는 순간, 아이는 어른들의 처벌 논리 속에서 가장 약한 자리에 놓이게 된다.

그렇다고 외도가 아이와 무관하다고 단정할 수도 없다. 최근 친구들과의 대화에서 어린 시절 부모의 외도 이야기가 나왔다. 그 친구는 부모의 외도로 인해 다른 부모가 오랜 기간 깊은 우울증에 빠졌고, 그 우울증의 그림자 아래에서 자신의 어린 시절 또한 무척 힘들었다고 말했다. “집안의 공기 자체가 무너져 있었다”는 말이 오래 마음에 남았다.

아이들은 어른보다 훨씬 민감하게 분위기를 읽는다. 표정과 한숨, 침묵을 통해 어떤 아이는 갑자기 지나치게 어려지고, 어떤 아이는 애어른이 되어 부모의 감정을 대신 떠안는다.

“저 사람은 바람을 피웠으니 아이를 볼 자격이 없다”는 문장은 시원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아이의 세계를 더 비좁게 만들 가능성이 크다. 아이는 한쪽 부모를 미워함으로써 충성심을 증명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고, 그 과정에서 자기 감정의 주인이 되지 못한다.

외도는 배우자에게서 끝나는 피해가 아니다. 그 상처는 자녀에게까지 번져 대물림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진짜로 묻고 답해야 할 질문은 이것이다. “누가 더 나쁜가”가 아니라, “이 아이의 마음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이다. 외도의 끝을 처벌로만 정리할 것인지, 아니면 아이의 회복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볼 것인지에 따라, 그 가정의 다음 장면은 완전히 달라진다. 아이는 온전히 사랑받아야 할 충분한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노주희 법무법인 새별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