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표현주의는 전후 추상미술의 회화적 귀환이었다

2025-12-18 14:26:57 게재

정광균의 80일간 유럽미술관 산책

모더니즘의 종언과 포스트모더니즘의 서막 (24)

필자는 나 홀로 자유여행으로 버킷리스트 중 하나였던 ‘80일간의 유럽미술 여행’을 다녀왔다. 유럽 12개국의 주요 미술관 순례 경험을 바탕으로 ‘르네상스 이후의 고전과 모던 미술’을 재조명해본다. 본 연재는 먼저 약 500년간 지속된 고전미술의 흐름, 즉 르네상스-바로크-로코코-신고전주의-낭만주의-사실주의에 이어 모더니즘의 서곡인 인상주의와 서막인 후기 인상주의를 살펴보았다. 이로써 재현중심의 고전미술은 표현중심의 모더니즘 미술로 패러다임이 전환되었다. 모더니즘의 본 막으로 등장한 야수파-입체파-표현주의-아르누보-빈 분리파에 이어 나타난 다다이즘-신즉물주의-초현실주의는 제1차 세계대전의 폐허와 반성 속에서 태동한 예술의 응답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 사이에 등장한 추상미술-신조형주의-에콜드파리는 예술의 본질, 형식, 목적에 대한 총체적 전환과 실험이었다. 이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등장한 앵포르멜에 이어 후기모더니즘의 마지막 불꽃이었던 독일의 신표현주의를 본 연재의 마지막 편으로 살펴본다.

신표현주의(Neo-Expressionism)는 1970년대 말~1980년대 초 독일에서 등장한 미술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추상 중심으로 흐르던 유럽 미술 속에서 다시금 감정과 인간 내면의 정서를 회화의 장으로 불러낸 사조였다. 전후 미술은 한동안 유럽의 앵포르멜과 미국의 추상표현주의가 주도했으나 미술의 중심이 파리에서 뉴욕으로 이동하면서 1960~1970년대에는 미국의 미니멀리즘, 팝아트, 개념미술이 세계 미술의 흐름을 지배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전후 독일은 나치의 폭정, 전쟁의 폐허, 분단이 남긴 죄책감, 상실감과 불안감이 사회 전반에 그림자처럼 짙게 드리워 있었다.

지나치게 차갑고 개념적인 미술은 이러한 감정의 지층을 담아내기 어려웠고 결국 표현되지 못한 감정과 기억들은 회화를 다시 소환하게 되었다. 이렇게 탄생한 독일의 신표현주의는 미국 미술의 부상 이후 존재감이 약화된 유럽의 회화적 정체성을 주장한 선언이자 감정·신화·역사·물질성을 중심으로 한 회화의 귀환이었다. 이제 본 연재는 르네상스 이후의 고전 및 모던 미술을 재조명하는 여정을 마무리하면서 유럽 미술이 모더니즘에서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미술로서 신표현주의를 간략히 살펴보고자 한다.

신표현주의는 독일의 표현주의에서 시작된 ‘격정과 색채’의 흐름이 이어진 미술

필자는 지난해 7월 25일에서 26일은 베를린의 국립갤러리(신 국립 회화관, 함부르커 반호프 미술관), 8월 10일은 함부르크 미술관, 8월 18일은 런던의 테이트모던 미술관 등을 방문하면서 독일 신표현주의 미술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았다. 이 밖에 쾰른의 루트비히 미술관,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도 신표현주의 작품이 다수 있는데 이를 포함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둘러본 결과 신표현주의는 하나의 독립된 사조이면서도 전쟁이 남긴 상처가 회화로 폭발한 마지막 파동처럼 느껴졌다. 20세기 초 독일의 표현주의(다리파, 청기사파)에서 시작된 격정과 색채의 파동이 앵포르멜을 거쳐 다시 독일에서 되살아난 것 같았다. 바젤리츠의 뒤집힌 인물, 키퍼의 재와 납의 지층, 이멘도르프의 분단 알레고리, 뤼페르츠의 독일 성 탐구는 모두 전후 세대가 외면하거나 억눌렀던 감정·역사·신화를 다시 회화의 자리로 불러낸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들은 어떻게 하나의 사조로 묶이게 되었는가? 신표현주의라는 명칭을 처음 사용한 사람은 미국의 미술비평가 도널드 쿠스핏이었다. 그는 1980년대 초 독일에서 신 야수들(Neue Wilde)이라 불리던 젊은 화가들의 회화적 움직임을 표현주의의 현대적 계보로 규정하였다. 이처럼 그들은 동시대 독일에서 회화의 귀환을 이끌었지만 하나의 그룹이나 단체로 활동하지 않았기에 각자의 화풍도 서로 달랐다. 다만 이들에게는 몇 가지 공통된 미학이 있었다. 인간의 상처·공포·욕망을 숨기지 않는 거친 감정, 화면 위에 물질처럼 쌓아 올린 두꺼운 임파스토(Impasto), 대담하고 단호한 붓질, 독일 특유의 청록·적색·흑색이 이루는 강렬한 색 대비, 그리고 신화·역사·문학적 모티브를 오늘의 감각으로 재해석한 거대한 스케일의 회화가 그것이다. 이러한 점들은 신표현주의의 특징이며 감상의 포인트가 된다.

바젤리츠의 ‘안락의자에 앉은 남자’는 전후 독일의 상처를 상징하는 신표현주의 명작

이제 신표현주의 대가들의 명작을 살펴본다. 한스 게오르그 바젤리츠(1938~ )는 ‘뒤집힌 그림’으로 잘 알려진 독일 신표현주의의 선구자이자 전후 독일의 정체성을 회화적 언어로 다시 구축한 화가였다. 동독 작센주의 도이치 바젤리츠 마을에서 태어난 바젤리츠는 나치의 몰락과 전후의 혼란을 어린 시절부터 온몸으로 겪었다. 드레스덴 미술 아카데미에서 사회주의 리얼리즘 교육을 받았으나 이를 거부해 퇴학당한 후 서독으로 넘어가 20세기 초 독일표현주의 화가 브뤼케의 거친 색채, 키르히너의 왜곡된 인체 등에 영향을 받으며 자신만의 회화 언어를 구축했다. 그가 1969년 처음으로 ‘뒤집힌 인물’을 발표했을 때 평단은 충격과 논쟁 속에서 분열되었다. 그러나 바젤리츠는 “나는 대상을 뒤집음으로써 회화 그 자체에 집중하게 만든다”라고 말하며 자신이 찾고자 한 회화의 본질을 끝까지 지켜냈다.

안락의자에 앉은 남자
안락의자에 앉은 남자(그림 1)

안락의자에 앉은 남자’(Der Mann im Sessel, 1977, 250 × 180cm, 유화, 출처: Staatliche Museen zu Berlin)는 베를린의 국립갤러리가 소장하고 있는 대표작 중 하나다 (그림 1). 뒤집힌 남성 형상은 전후 독일의 상처를 상징하는 하나의 기호였고 그 위에 덧입혀진 두꺼운 물감층과 오렌지·황토·청색·암회색의 폭력적인 대비는 전후 독일 심리의 파편화된 정서를 그대로 드러낸다. 이러한 색의 지층은 역사적 상흔과 존재적 불안을 상징하는 시각화한 것이자 감정·몸짓·물질성을 회화의 전면으로 되돌리는 신표현주의의 언어였다. 이 작품은 신표현주의의 출발점이자 포스트모더니즘 회화로 넘어가는 중요한 분기점으로 평가된다.

키퍼의 ‘마르가레테’는 전후 독일 국민의 심리, 기억, 고통을 보여주는 걸작

안젤름 키퍼(1945~ )는 전후 독일의 역사·기억·죄책감을 물질의 층으로 쌓아 올린 신표현주의의 거장이자 모더니즘 이후 독일미술을 다시 역사의 장으로 불러낸 화가였다. 독일 남부 도나우에싱겐에서 태어난 키퍼는 폐허 속에서 유년을 보냈고 “우리는 무너진 집들 사이에서 놀았다. 그 잔해는 나의 첫 조각 교실이었다”라고 회상한 바 있다. 이러한 기억은 훗날 그의 작업이 지닌 물질적 기원의 배경이 된다. 1960년대 이후 미국 미술이 개념미술·미니멀리즘·팝아트로 기울어 갈 때 키퍼는 그 반대편에서 불·재·납·지푸라기·콘크리트 같은 비전통적 재료로 전후 독일의 금기된 기억을 끌어올렸다. 그는 “예술은 과거의 침묵에 틈을 내는 일”이라고 말하며 누구도 말하려 하지 않았던 나치 시대의 광기와 신화적 구조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마르가레테
마르가레테(그림 2)

마르가레테’(Margarete, 1977, 290 × 400cm, 혼합 매체, 출처; MMK Frankfurt)는 프랑크푸르트 현대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그의 대표작 중 하나다(그림 2). 작품은 파울 첼란의 시 ‘죽음의 푸가(Todesfuge)’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화면을 뒤덮는 황금빛 지푸라기는 독일의 이상적 여성상인 ‘금발의 마르가레테’를 상징하지만 그 빛은 불길의 흔적처럼 거칠게 타오르고 있어 전후 독일의 상흔을 드러낸다. 재와 납의 무거운 회색 지층, 지푸라기의 타오르는 듯한 황금색은 기억·고통·역사의 층위를 시각적 구조로 치환한 것이다. 이 작품은 신표현주의가 단순한 회화의 귀환을 넘어 전후 독일 국민의 심리, 기억, 고통을 보여주는 걸작으로 평가된다.

이멘도르프의 ‘카페 도이칠란트 I’은 분단 독일의 현실을 생생하게 그려낸 명작

예르크 이멘도르프(1945~2007)는 독일의 분단 현실과 정치적 긴장을 회화적 연극성으로 보여준 화가였다. 독일 북부의 블로메르하에서 태어난 그는 1950~1960년대 냉전과 이념대립이 일상화된 분단 시대를 통과하며 성장했다. 그는 “독일의 문제는 내 개인의 문제이며 나는 내 안의 분단을 그리고 싶었다”라고 회상한 바 있다. 그의 작품세계는 이러한 배경 속에서 탄생한 것이다. 바젤리츠, 키퍼가 신표현주의를 형식의 갱신으로 이끌었다면 이멘도르프는 역사·정치·대중문화가 뒤엉킨 독일의 정신적 풍경을 회화적 사건으로 재구성했다. 밤거리의 클럽, 연기 자욱한 술집, 싸움과 춤이 뒤얽힌 장면들은 단순한 풍경이 아니라 분열된 국가가 일상의 틈에서 드러내는 무의식의 얼굴이었다.

카페 도이칠란트 I
카페 도이칠란트 I(그림 3)

카페 도이칠란트 I’(Café Deutschland I, 1978, 290 × 380cm, 유채, 출처: Museum Ludwig, Cologne)는 쾰른 루트비히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그의 카페 연작 중 하나다(그림 3). 작품은 나이트클럽의 혼란스러운 장면 속에 동·서독의 정치적 갈등과 이념의 충돌을 과장된 몸짓과 상징으로 풀어낸다. 화면 가운데의 벽돌 구조물은 심리적·정치적 장벽을 상징하고, 등장인물들의 뒤틀린 자세와 과장된 표정은 당시 독일 사회의 불안정한 정서를 드러낸다. 그렇게 이멘도르프는 회화를 통해 역사적 모순을 표면으로 끌어올렸고 분단된 독일이 스스로 던지지 못한 질문들을 화면 위에서 연극처럼 재현했다. 작품은 회화의 복귀를 넘어 정치적 상처와 사회적 무의식의 귀환을 선포한 것으로서 분단 독일을 생생하게 시각화한 명작으로 평가된다.

독일의 신표현주의는 예술이 여전히 시대를 질문하고 응시할 수 있음을 보여준 미술

이렇게 독일 신표현주의는 전쟁의 폐허 위에서 다시 말을 걸기 시작한 예술의 응답이었다. 그들은 회화를 다시 불러냈지만 그것은 재현이 아니라 역사·기억·상처·몸짓의 흔적이었다. 바젤리츠는 형상을 뒤집음으로써 이름 없는 몸을 회화의 본질로 환원했고 키퍼는 불·재·지푸라기 같은 물질로 역사적 죄책감과 신화의 잔해를 쌓아 올렸으며 이멘도르프는 분단 독일의 혼란과 심리적 균열을 연극적 장면으로 재현하며 정치적 무의식을 화면으로 끌어내었다.

여기서 독일의 신표현주의는 미술사적으로 몇 가지 중요한 시사점을 남긴다. 첫째, 신표현주의는 모더니즘이 뒤로 밀어두었던 역사와 기억의 귀환을 선언했다. 회화가 다시 시대와 정치, 윤리와 죄책감을 이야기하는 장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둘째, 이들은 표현의 회복을 넘어 감정·몸짓·물질성을 전면에 배치함으로써 앵포르멜이 탐구했던 내면의 충동을 역사의 무게로 확장했다. 셋째, 이들의 작업은 이미지의 부활이 아니라 의미의 재구성이었다. 시대를 향한 물음이 다시 그림 속에서 살아났다는 점에서 이는 전후 독일 예술의 전환점이 되었다. 이렇게 독일의 신표현주의는 미국 중심의 국제미술에 유럽의 마지막 응답이자 독일이 “우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라고 말하며 내놓은 마지막 선언이었다. 이는 곧 유럽 정체성의 복원이자 예술이 여전히 시대를 질문하고 응시할 수 있음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에필로그 : 유럽 미술, 시대정신의 거울에서 실험의 무대로

유럽 미술의 여정은 거대한 시간의 강을 건너는 일과 닮아 있었다. 르네상스로부터 시작된 인간의 발견은 바로크의 권력, 로코코의 쾌락, 신고전주의의 계몽, 낭만주의의 자유 정신, 사실주의의 현실 참여로 이어졌다. 이어 인상주의와 후기 인상주의는 빛과 감각, 색과 형태를 탐구하며 새로운 회화혁명의 문을 열었다. 르네상스 이후 500년간 지속된 재현중심의 고전미술이 종언을 고하고 표현중심의 모더니즘 미술로 패러다임이 전환된 것이다. 20세기 들어 유럽은 미술사적 대전환기를 맞이했다. 야수파는 색채의 해방을, 입체파는 형태의 해체를, 표현주의는 내면의 격정을, 다다이즘과 신즉물주의는 반예술의 풍자와 냉소를, 초현실주의는 무의식의 이미지를 드러냈다. 이어 추상미술과 신조형주의는 색과 형태 자체를 보편 언어로 만들었고 에콜 드 파리는 다문화적 교류의 장이 되었다.

그러나 두 차례의 세계대전은 모든 것을 바꾸어놓았다. 유럽이 폐허가 되자 실험의 불씨는 대서양을 건너 뉴욕으로 옮겨갔고 현대미술의 중심은 그곳에서 새롭게 박동했다. 그럼에도 전후 유럽에서 앵포르멜이 남긴 뜨거운 잔여 에너지가 독일에서 마지막으로 타오른 것이 신표현주의였다. 이렇게 르네상스의 빛에서 출발한 유럽 미술의 여정은 대항해시대의 팽창, 프랑스혁명의 열기, 산업혁명의 빛과 그늘,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 남긴 상처와 인간의 소외, 고독, 불안의 그림자를 지나 신표현주의의 거친 숨결 앞에서 멈추어 선 것이다. 그러나 그 멈춤은 끝이 아니라 오히려 다시 미술을 생각하게 만드는 고요한 지점이었다. 그렇다. 예술은 언제나 ‘시대정신의 거울’이면서도 동시에 ‘시대를 실험하는 무대’였던 것이다. 그 무대가 베르사유의 궁전이었든, 파리의 살롱이었든, 몽마르트르의 카페였든, 혹은 바우하우스의 강의실이든 그 장소들은 모두 예술이 새로운 가능성을 시험하던 현장이었다. 그리고 그 공간들을 마주했던 경험들은 훗날 ‘문화·예술 도시를 걷다’ 에서 다시 이어질 것이다.

이제 유럽 미술사의 긴 여정을 마무리한다. 실험과 모험, 그리고 변신으로 가득한 이 대서사시는 결국 하나의 질문으로 귀결된다. “예술은 무엇을, 그리고 어떻게 새롭게 보여줄 것인가?”였다. 그리고 그 질문의 배후에는 언제나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향한 오래된 질문이 놓여 있었다. 유럽 미술의 흐름은 결코 직선이 아니었다. 어떤 시대는 인간을 찬미했고, 다른 시대는 인간을 의심했다. 어떤 순간에는 형상이 사라졌고, 또 다른 순간에는 색이 사유가 되었으며, 전후의 폐허 속에서는 몸과 감정만이 마지막 진실처럼 남았다. 그렇게 예술은 시대의 언어를 바꿔가며, 인간의 감정과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을 끊임없이 재구성해왔다.

필자는 ‘르네상스 이후의 고전과 모던 미술’을 재조명하면서 예술은 유행이나 사조보다 오래 살아남는 삶의 감각이며 시대를 비추는 정신의 기록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 미술관에 걸린 수많은 작품은 모두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저마다 한 시대의 상처와 꿈, 두려움과 희망을 담고 있었다. 그 앞에 서서 작품과 마주하는 순간은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명작 속을 걷는 것처럼 한 시대의 거울을 읽고 시대를 실험한 거장들과 조용히 대화하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 발걸음은 ‘명작 속을 걷다’라는 책으로 독자 여러분을 찾아가게 될 것이다.

유럽 미술사는 결국 인간에 대한 이해의 역사였다. 그림은 그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의 숨결이며 삶의 결을 따라 흔들리던 감정의 그림자이며 언어보다 먼저 도착하는 사유의 빛이었다. 이 여정을 따라 걸으면서 필자는 미술이란 사조의 경계를 넘어 시대정신과 인간의 감성이 겹겹이 흐르는 ‘깊은 강’이며 미술관 산책은 그 강가를 따라 걷는 ‘사색의 길’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끝으로 이 여정의 기록을 맡겨준 내일신문사 측에 깊이 감사드린다. 그리고 독자 여러분이 이 여정을 통해 미술을 조금이라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게 되었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예술은 정답을 말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를 더 깊은 감정으로 더 넓은 세계로 데려다준다. 미술관에서 한 작품 앞에 멈춰 선 그 순간조차도 우리의 내면을 흔드는 작은 기적이 된다. 현실의 길로 돌아가더라도 유럽 미술이 남긴 질문들은 오래 남을 것이다. 예술은 이제까지 그래왔듯이 “인간은 무엇을 느끼며 무엇을 바라보고 어떻게 살아왔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면서 언제나 우리보다 한발 앞서 걸어갈 것이다.

정광균 칼럼니스트(전 주이집트 대사 관광학박사 문화예술칼럼니스트)
정광균 칼럼니스트(전 주이집트 대사 관광학박사 문화예술칼럼니스트)

정광균 칼럼니스트는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제19회 외무고시에 합격하여 외교관의 길을 걸었다. 주토론토 총영사와 주이집트 대사를 역임하며 외교 현장에서 풍부한 경험을 쌓았다. 외교관 은퇴 후에는 학문의 길로 전환하여, 한양대학교 관광학과에서 DMZ 관광개발과 관광자원 분야를 연구하며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남서울대학교 관광경영학과 객원교수와 한양대학교 관광학과 및 국제관광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며 교육자로서도 활동했다. 현재는 추계예술대학교 대학원 문화예술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서양미술사 분야의 학위를 준비 중이다. 동시에 한국미술협회 산하 일원회와 현대사생회 회원으로 활동하며 화가로서도 활발히 작품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필자는 외교관으로서의 국제적 시각, 관광학 전문가로서의 학술적 접근, 현장 예술가로서의 실제적 안목, 서양 미술사 연구자로서의 전문성을 두루 갖추고 있다. 이러한 다면적인 배경을 바탕으로, 단순한 여행기나 미술사 해설을 넘어서는 심도 있는 연재를 선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