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약살롱

‘필수의료’라는 유령

2025-12-22 13:00:01 게재

“필수의료가 몰락하고 있다.”

“2026년 필수의료 전공의들 지원 저조.”

“정부, 필수의료 지원에 최선을 다하기로.”

언론의 기사 제목처럼 최근 보건의료 분야의 화두는 ‘필수의료’라는 말일 것이다. 2024년 초부터 의과대학 정원 문제로 불어 닥친 의료대란 시국에서는 여러 종합병원의 응급실부터 중요 수술을 하는 전문과들이 무너지면서 더욱 많이 쓰였다.

필자는 방송이나 신문에서 이 말이 쓰일 때마다 내용을 만든 기자에게 “도대체 내용을 알고 기사화한 건지” 따지고 싶을 정도이다. 필수의료라는 말은 족보도 없고, 정체성도 없는 용어여서 큰 혼란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기억하기로는 2010년대 중후반부터 이 말이 사용됐던 것 같다. 계속되는 일부 전문과들의 몰락이 사회문제화 되니까 특별히 지칭해서 부르기 시작한 것이 조금씩 통용하게 된 것이다.

무엇이 필수의료라는 말인지 짐작해보면 흔히 외과 산부인과 신경외과 흉부외과처럼 수련은 힘들고 환자를 치료하는 데에는 엄청난 노력이 필요한 전문과들을 얘기하는 듯하다. 그러던 것이 요즘은 소아청소년과까지 덧붙어졌다. 그럼 간경화나 간암을 다루거나 심근경색같이 위중한 심혈관질환을 다루는 내과는 필수의료 아닌가? 정신질환을 다루는 정신건강의학과는 어떤가? 우리나라에서 인정한 25개 전문과들은 어떻게 분류할 것인가?

국내외 논문에도 필수의료라는 개념 없어

용어의 근원을 찾으려고 관련 논문을 뒤져봤다. 2019년에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한 연구원이 필수의료(Essential health care)에 대해서 여러 자료들을 정리해서 발표한 것이 있다. 거기에서도 세계보건기구는 필수의료기술이라는 내용은 있지만 필수의료라는 말은 없다면서 마땅한 정의를 하기에는 문제가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명확한 정의는 없지만 대강 ‘국민생명과 직결된 분야, 응급·외상·심뇌·중환자·신생아·고위험 등 긴급·시급한 의료영역으로, 지연되었을 경우 국민 생명과 건강에 대한 영향이 크고, 시장실패로 인해 질적 수준의 문제 발생, 균형적인 공급이 어려워 국가가 직접 개입해야 하는 필요성이 큰 의료 영역’이라고 에둘러 표현했다.

외국 논문 검색창이나 외국어로 필수의료 관련 용어를 뒤져도 찾아볼 수가 없다. 다만 ‘Essential medicine’ 혹은 ‘Essential health care’를 검색하니 일차의료라고 표현하는 곳이 많았다. 굳이 필수의료 용어를 사용한다면 이 표현이 정확할 것 같다. 사람들이 건강 문제가 있으면 제일 먼저 접하면서 포괄적으로 돌보니 필수의료 아니겠는가?

다른 전문 분야도 마찬가지이지만 보건의료 영역에서도 세계가 공히 사용하는 용어를 사용해야 한다. 외국에서 흔히 쓰이면서도 아직 우리가 용어 정리를 못했다면 학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적확하게 우리의 것으로 표현해내면 된다. 일차보건의료, 의료전달체계, 국민의료비, 의료보험 등은 외국에서 의료정책 분야에서 쓰이는 용어였고, 우리나라에서는 오랫동안 논의를 거쳐서 관련 학자들이 학술적으로 다듬어놓은 말이다. 한 용어를 공적으로 쓰기 위해 수없이 많은 논문들이 동원되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처럼 어느 나라에서도 사용하지 않는 용어를 억지로 갖다 쓰는 건 학술적 측면에서도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고, 자칫 정책 혼란을 가져올 수도 있다. 필수의료 지원 정책을 만들 때 어디를 지원해야할지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얘기다.

애초 의료라는 것은 사람이 존재하면서부터 중요하게 다뤄졌고, 사람을 살리고 건강하게 돌보는 분야이기 때문에 삶에서 가장 중요한 분야일 수밖에 없다. 모든 분야가 필수의료 영역이어야 하고 그것을 필수니 비필수니 나누는 무지함을 지양했으면 좋겠다.

차라리 ‘비인기과’ ‘힘든 전문의과’로 쓰자

외과 산부인과 신경외과 흉부외과 응급의학과 등 힘들게 수련 과정을 거쳐야 하지만 인기가 없는 전문과들을 굳이 나누려고 한다면 ‘비인기과’ ‘힘든 전문과’와 같이 솔직하게 표현하자. 출산율이 줄어들고 경쟁은 높아지면서 환자가 줄어서 힘들다고 아우성치니 슬그머니 소아청소년과를 필수의료 분야로 집어넣는 몰상식은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 우려스럽다.

힘들게 수련하고 힘들게 환자들을 돌보는 전문과들이 있다면, 소송 때문에 두려워하는 전문과가 있다면 적절한 지원과 보상, 방어를 해주면서 그 일을 마음 놓고 하게 하면 된다. 그러다보면 과거처럼 그 전문과들의 전공의 지원이 몰리고, 세간의 존경을 받으면서 인기과로 불리는 날도 올 것이다. 굳이 필수라는 명함을 붙여놓고 ‘나 몰라라’하는 정부당국과 정체성도 없는 표현을 받아쓰는 언론의 각성을 바란다.

고병수 탑동365일의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