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시평
일본 기업의 관리직 기피 딜레마
최근 일본의 젊은 세대 사이에서 관리직을 기피하는 현상이 확대되고 있다. 한때 관리직은 승진과 사회적 성공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관리직은 더 이상 매력적인 목표가 아니다. 책임은 무겁지만 권한과 재량은 제한적이고, 문제 발생 시 책임만 떠안는 역할로 인식되면서 젊은 세대에게는 오히려 피하고 싶은 자리, 이른바 ‘벌칙 게임’처럼 여겨지고 있다.
일본능률협회매니지먼트센터가 2023년에 실시한 직장인 의식조사에 따르면 일반 사원의 약 77.3%가 관리직이 되기를 원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결과는 관리직 승진을 기피하는 인식이 특정 집단에 국한되지 않고, 일본 기업 전반에 상당히 광범위하게 확산되어 있음을 시사한다.
젊은 세대에겐 피하고 싶은 ‘벌칙 게임’
이러한 인식 변화의 배경에는 버블경제 붕괴 이후 장기화된 일본 경제의 침체가 자리하고 있다. 기업들은 수익성 악화를 극복하기 위해 인건비 억제에 나섰고, 그 과정에서 관리직 인원을 줄이는 동시에 피라미드형 조직을 평탄화했다. 한 명의 관리직이 책임져야 할 부하직원 수는 크게 늘어났고, 관리·조정·보고·평가 등 관리직의 역할은 오히려 확대되었다. ‘슬림한 조직’이라는 이름 아래 관리직의 부담만 비대해진 셈이다.
관리직으로 승진했을 때 기대할 수 있는 보상도 갈수록 줄어들었다. 책임과 부담은 커졌는데 이에 상응하는 금전적 보상이 뚜렷하지 않다면 굳이 관리직을 선택할 유인은 약해질 수밖에 없다. 또한 기업들은 ‘플레잉 매니저’를 확대했다. 이는 인력충원을 최소화한 채 관리직에게 실무까지 병행하도록 요구하는 방식이다. 관리직은 스스로 업무를 처리하느라 부하를 육성할 여유를 잃었고, 업무를 위임하지 못한 채 과중한 업무를 떠안게 되었다. 그 결과 관리직은 성장과 성취의 단계가 아니라 ‘과로와 책임의 집합체’로 인식되게 됐다.
2019년부터 단계적으로 시행된 ‘일하는 방식 개혁’ 역시 관리직에게는 또 다른 부담을 안기는 결과로 이어졌다. 비관리직의 장시간 근로를 억제하겠다는 제도 취지 자체는 분명했지만, 문제는 업무량이 줄지 않은 상태에서 근로시간만 단축되었다는 점이다. 그 결과 정시에 퇴근하는 부하직원을 대신해 남은 업무를 관리직이 떠안는 구조가 현장에 고착되었다. 이제 많은 직장에서 관리직은 ‘가장 늦게까지 남아 일하는 사람’이 되었다. 이러한 상사의 모습을 일상적으로 목격한 젊은 직원들 사이에서 “관리직은 되고 싶지 않다”는 인식이 확산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결과일지도 모른다.
여기에 2019년 시행된 파워 하라스먼트 방지법(직장 내 괴롭힘방지법)도 관리직의 역할 수행 방식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 관리직은 책임은 크지만 행동 반경은 좁은 존재로 인식되기 시작했고 이는 관리직을 더욱 매력 없는 자리로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고용 형태의 다양화, 근로시간 규제, 각종 컴플라이언스 강화는 각각만 놓고 보면 합리적이고 필요한 제도 변화로 보인다. 그러나 현장에서 중첩되며 작동한 결과 관리직의 부담은 양적·질적으로 모두 확대됐다. 관리직 기피 현상은 단순한 세대의식이나 개인의 가치관 변화로 설명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제도 변화가 현장에 축적되며 만들어낸 구조적 결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한국도 관리직의 역할과 권한, 보상 재설계할 필요
한국 역시 장시간 근로 규제 강화, 고용 형태의 다양화, 성과주의 확산, 각종 컴플라이언스 강화라는 유사한 경로를 밟고 있다. 관리직의 역할과 권한, 보상이 재설계되지 않은 상태에서 제도만 누적될 경우 한국에서도 관리직이 ‘벌칙 게임’으로 인식되는 현상이 본격화될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관리직을 단순한 중간관리자나 책임 전가의 대상으로 둘 것이 아니라 조직 운영의 핵심 주체로 재정의하려는 논의가 지금부터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