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산업 흔드는 기후부장관
“용인 클러스터 이전” 발언에 산업계 당혹 … 투자 매몰·골든타임 실종 우려
김성환 기후에너지환경부 장관이 최근 수도권 전력 과부하를 이유로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의 지역 이전 필요성을 시사하면서 산업계의 우려가 깊어지고 있다.
전력 생산지와 소비지를 일치시키는 ‘지산지소’(地産地消) 정책 방향은 타당성이 있다. 하지만 이미 천문학적 자본이 투입된 국가전략사업을 흔드는 것은 기업의 생존을 위협할 뿐만 아니라 정부정책의 신뢰를 무너뜨릴 수 있다는 지적이다.
◆장관 한마디에 정부정책 신뢰 흔들 = 29일 반도체업계에 따르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각각 320조원, 120조원 규모의 투자를 확정하고 부지 조성과 인프라 설계를 진행하고 있다. 소재·부품·장비(소부장)와 팹리스 기업들도 이미 용인을 중심으로 생태계를 구축하고 있다.
이 가운데 김성환 기후에너지환경부 장관은 26일 한 라디오방송에 출연해 (수도권에 조성하는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구상과 관련해) “지금이라도 지역으로, 전기가 많은 쪽으로 옮겨야 되는 건 아닌지 고민이 있다”고 밝혔다.
그는 “용인에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가 입주하면 그 두 기업이 쓸 전기의 총량이 원전 15기, 15GW 수준이라 꼭 거기에 있어야 할지 (고민이 된다)”라며 이같이 밝힌 것이다.
하지만 에너지산업 주무부처 장관의 이같은 폭탄발언으로 우리나라의 핵심산업인 반도체 투자·기술·생태계 전반에 구조적 불확실성을 키우고, 불필요한 정책논쟁을 유발시켰다.
◆반도체 패권경쟁 속 생태계 붕괴 우려 = 업계가 우려하는 부분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 천문학적 매몰 비용과 경제적 기대효과 상실이다.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는 이미 국가 산업 전략으로 확정된 사업이다. 계획만 수립한 것이 아니라 일부 지역은 이미 부지조성을 끝내고, 건설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다. 이 과정에서 약 3만명 이상의 직접 고용과 최대 10만명에 달하는 연관 고용, 500조원 이상의 생산 유발 효과가 기대된다.
입지 재검토는 단순한 위치 변경이 아니다. 토지 조성, 인허가, 용수 교통 주거 인프라, 협력사 투자까지 포함된 복합적 투자구조를 흔드는 일이다. 이전 논의가 현실화되지 않더라도 정책의 불확실성만으로 투자 집행 지연과 금융·계약 비용 상승이라는 보이지 않는 손실까지 낳는다.
둘째, 글로벌 반도체 패권 경쟁의 ‘골든타임’ 실종이다. 미국 대만 일본 유럽은 반도체를 미래·안보산업으로 규정하고 속도전에 들어갔다. 이 시점에서 한국이 핵심 거점을 두고 내부 논쟁에 빠질 경우 경쟁국에 시간을 내주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클러스터 위치를 변경하려면 부지 선정부터 환경영향평가, 주민 합의까지 최소 수년 이상의 시간이 추가 소요된다. 이는 대만 TSMC, 미국 인텔 등 글로벌 경쟁사들이 정부의 전폭적 지원 아래 공장건설 속도를 높이는 상황에서 우리 기업의 경쟁력을 스스로 갉아먹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셋째, 반도체 클러스터 생태계의 붕괴 위험이다. 반도체 경쟁력의 본질은 개별 공장이 아니라 집적이다.
소부장기업 팹리스 물류 인력 연구개발이 일정 반경 안에서 유기적으로 연결될 때 생산성과 혁신이 유지된다. 일부 이전이나 분산 배치는 이 생태계를 쪼개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우수 인력의 이탈도 우려된다.
◆“지금 필요한건 일관성과 실행력” = 일각에서 제기되는 ‘새만금에 전력을 100% 재생에너지로 충당하도록 설계된 RE100 산업단지를 조성하고 반도체 생산시설 일부를 이전하자’는 주장도 현실적인 제약이 숨어 있다.
반도체 공정은 24시간 무정전, 고품질 전력이 필수다. 하지만 태양광·풍력 중심의 재생에너지는 출력 변동성이 커 자칫 불량률 급증으로 이어질 수 있다.
산업 인프라와 정주 여건 미비도 걱정되는 대목이다. 반도체는 전력만큼이나 막대한 양의 용수와 초정밀 물류망이 필요하다. 새만금은 현재 이러한 기반 시설이 용인 대비 현저히 부족하며, 핵심 엔지니어들을 유인할 교육·의료·문화 등 정주 여건 개선에 막대한 추가 예산이 투입돼야 한다.
반도체업계 관계자는 “산업 대전환 시대에는 우리 기업의 성장과 무역강국 도약을 뒷받침하는 글로벌 수준의 지원이 필수적”이라며 인프라 지원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어 “지금은 진행 중인 클러스터를 ‘어디로 옮길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전력을 공급할 것인가’의 문제”라고 지적했다.
전직 산업통상부 고위 관계자는 “반도체는 한국 수출과 기술 경쟁력의 핵심 축이다. 이미 확정된 정책을 흔드는 건 시장에 불확실성만 남긴다”며 “지금 필요한 것은 약속된 투자가 차질 없이 이행되도록 전력과 용수를 적기에 공급하는 정부의 일관성과 실행력”이라고 강조했다.
이재호·고성수 기자 jhlee@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