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진단

2026년 글로벌 질서와 한반도 안보 전망

2026-01-02 13:00:01 게재

‘무질서(Anarchy)’. 아산정책연구원이 2026년 국제질서를 전망하면서 내놓은 키워드다. 윤영관 전 외교통상부장관이 이사장으로 있는 아산정책연구원은 해마다 국제질서를 전망하면서 한해를 관통할 핵심 키워드를 제시하는데 작년에는 ‘리뉴얼(Renewal)’을 내놓았고, 그 전해인 2024년에는 ‘연대(Coalition)’를 내놓은 바 있다.

강대국 이기주의가 팽배하고 주요 지역 곳곳에서 전쟁이 진행되거나 혹은 발발 위기가 만연한 상황에서, 2026년의 국제질서를 ‘무질서’로 평가함은 전혀 무리가 없어 보인다. 무질서한 국제질서의 한가운데에 트럼피즘이 자리잡고 있고, 이름은 다르지만 각 국가마다 일종의 유사(類似) 트럼피즘인 독일의 ‘독일을 위한 대안(AfD)’, 네덜란드의 ‘자유당’, 아르헨티나의 ‘말레이 리더십’ 등이 유행하고 있다.

무질서하지만 미국 중심의 다극화

‘무질서의 국제질서’가 정확한 진단인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을 수 있으나 국제사회에 신뢰할만한 보편적인 기준이 사라지고, 여기저기서 지역의 맹주를 지향하는 ‘다극화 현상’이 뚜렷하다는 점에는 대부분의 국제정치학자들이 공감한다.

전재성 서울대 교수는 지난해 12월 19일자 본지의 ‘금요진단’ 지면에서 작년 한해를 리뷰하면서 ‘반패권, 다극화, 민주적인 세계질서를 주장해 온 수정주의 세력들은 대안적 세계질서를 요구한다’는 점을 지적했다. 한마디로 미국의 주도력이 약화된 다극화 현상을 강조한 것이다.

미국의 글로벌 리더십이 약화된 건 물론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미중 간 전략경쟁이 국제사회 안에 구조적으로 자리잡게 되면서, 미국의 축소된 역할에 대한 논란은 끊이지 않고 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아직까지 미국의 존재와 역할을 전제로 한 국제질서 작동에는 큰 변화가 없다. 트럼프 대통령의 재집권과 함께 미국의 신고립주의 주장마저 제기되고 있지만 미국 중심의 국제질서를 대체할 대안적 국제질서는 여전히 요원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내외 많은 전문가들이 한 목소리로 무질서, 다극화, 강대국 이기주의의 충동 등에 대한 우려를 표명하고 있는 현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트럼피즘은 하나의 표출 방식일 뿐 미국이 과거와 같이 국제사회의 경찰국가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미국 국민들의 생각은 분명해 보인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러한 미국인의 보통 정서를 ‘비용문제’와 ‘반중정서’로 활용하는 정치술을 보이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는 두가지 차원의 설명이 필요하다. 첫째, 왜 각종 국제안보 사안에 미국이 막대한 비용을 지출하면서 책임을 져야 하냐는 미국인의 불만은 두 개의 얼굴을 하고 있다. 소위 국제질서 안정을 위한 공공재의 명목으로 미국이 너무 많은 출혈을 감당했다는 억울함이 하나의 얼굴이라면, 미국의 막대한 지출은 공공재로 작용하면서도 동시에 결과적으로 미국에게 막대한 이익을 안기는 사유재라는 또 다른 얼굴도 있는 것이다. 멀리 갈 것 없이 한미동맹 미일동맹 나토동맹은 해당 국가들의 안보불안을 제거해 주지만 동시에 미국에게도 다양한 유형 무형의 국가이익이 있다는 점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둘째, 짐작건대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이 국제사회의 각종 현안에서 발을 조금 뺀다고 해도 미국의 지위와 막강한 힘을 대신할 대체재 혹은 대체 국가가 없다는 점을 너무도 잘 알고 있는 듯하다. 어떤 형태로든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끝나게 되면 러시아는 상당 기간 글로벌 리더십을 발휘할 기회와 역량을 회복하기가 어렵다.

중국은 소위 ‘중국 모델’을 강조하면서 중국을 동심원으로 한 국제질서 재편을 꾀하고는 있지만 ‘중국 모델’이 무엇인가에 대한 실체 논쟁에서부터, 여러 국가들이 중국 모델을 국제질서의 보편적인 규준으로 수용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회의적인 시각이 지배적이다.

바로 이런 배경에서 ‘무질서’와 ‘다극화 현상’이 고스란히 미국의 지위 하락으로 전환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혹시 트럼프 대통령과 미국의 전략가들은 내심에는 주요 동맹국에게 막대한 비용을 부담시키고 투자 명분으로 지금까지의 미국의 손실을 일방적으로 충당하더라도, 결국 국제사회는 미국을 쳐다보면서 의존하게 될 것이고, 미국이 영향력을 축소한다고 하더라도 그 공백을 대체할 다른 강대국이 쉽게 등장하지 않을 것이라는 전략적 자신감이 깔려 있는 건 아닐까.

이런 생각이 지난 한해 동안 트럼프 표정책으로 구현되어 전례가 없었던 상호관세 부과가 있었고 미국의 동맹 현대화 정책이 있었다는 분석이 가능할 것이다. 어찌 보면 작년 하반기 무렵 세계 언론에서 미국을 향해 지칭했던 ‘돈로주의(도날드 트럼프 + 먼로주의)’는 이러한 현실의 반영인 셈이다.

‘트럼피즘’과 ‘트럼프 유산’ 구분해 대비

결국 2026년 올 한해의 국제질서 전망을 위해서는 ‘무질서하지만 여전히 미국에게 의존하는 다극화된 국제질서’, 이게 정확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트럼프 대통령의 리더십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는 건 사실이지만 우리는 ‘트럼피즘’과 ‘트럼프의 유산’을 구분해서 고민할 준비를 해야 하고, 마가(MAGA) 내부 진영의 균열이 어떤 형태로든 오는 11월 중간선거에 반영되어 충분한 수준은 아니더라도 민주 공화 양당이 본래의 정당 기능을 복원할 가능성에 대해서도 대비해야 할 것이다.

이 와중에 유럽 동아시아 중동 남미 등지에서는 크고 작은 안보위기가 비등하고, 그 틈을 타서 몇몇 지역 맹주들이 지역 차원의 영향력 확산을 꾀할 가능성이 크다. 중국 러시아 독일 이란 사우디 인도 브라질 등이 여기에 해당하는데 이들 국가들 역시 외교정책에 투입할 리소스가 제한적인 상황이라, 새로운 글로벌 질서 변화를 추구할 엄두는 내지 못할 것이고 대신 브릭스(BRICS, 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 남아공) 혹은 글로벌 사우스 등을 중심으로 다극화 현상이 가속화되는 경향이 두드러지리라 예상된다.

한국, 정교한 외교적 지혜 필요하다

‘무질서하지만 미국 중심의 다극화’ 상황에서 과연 한국에게 기회가 있을까? 이재명정부의 실용외교가 한국의 국가이익을 확보할 틈 새 시장을 확보할 수 있을까?

2025년이 막을 내릴 무렵 대통령실은 오는 4~7일 이재명 대통령의 중국 국빈 방문을 발표했다. 미중 갈등이 전례가 없이 노골화된 순간, 미중 갈등에 가장 노출이 심한 한국의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하게 된 것이다.

이 대통령의 방중을 앞두고 1월 1일 아침 중국 왕이 외교부장은 두 가지 포인트를 짚었다. 하나는 항일전쟁 80년에 맞춰 한국이 일본의 역사 왜곡에 맞서야 한다는 점, 그리고 대만 문제에 관한 ‘하나의 중국 원칙’을 고수해야 한다는 점을 공개적으로 강조한 것이다.

미중 사이에서 어떤 외교적 스탠스를 취하느냐는 우리가 직면한 최대 외교 난제이지만 상대적으로 미국이 요구하는 과제는 어렵지만 선명하고, 중국이 요구하는 과제는 어려우면서도 불투명한 측면이 있다.

전자의 경우 3500억달러의 대미 투자, 방위비분담금 인상, 동맹현대화에 따른 GDP 대비 국방비 3.5%로 증액, 핵잠수함 건조 관련 팩트시트 확인과 같이 지난하지만 심플한 측면이 있다. 반면 후자의 경우 ‘한한령’의 실체가 무엇이고 또한 완전한 해제가 가능한 것인지, 대만사태 시 중국이 한국에 요구하는 정확한 스탠스가 무엇인지, 한미일 협력이 보편적인 국제안보에 기여하는 측면과 중국의 이해관계를 침해하는지 측면을 구분하기는 매우 어렵다.

물론 이 또한 한국 전략가들이 책임져야 할 몫이다. 모두가 목소리를 내고 싶어 하지만 어느 누구의 목소리도 보편적인 지위를 인정받기 어려운 2026년의 국제질서다. 더욱 정교한 외교적 지혜가 필요한 때다.

박인휘 이화여대 교수 국제정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