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력망에 돈 몰린다…에너지전환 승부처는 기승전'전력망’
전 세계 투자 7년 새 두배 급증 … 투자 늘어도 ‘발전 대기’ 병목현상은 여전
세계 에너지전환의 중심축이 발전설비에서 전력망(그리드)으로 이동하고 있다. 재생에너지 확대와 전력수요 급증 속에 주요국들은 병목 해소와 계통 안정성을 위해 전력망에 막대한 자금 투입에 나섰다.
7일 세계적인 에너지 분야 리서치 기관인 블룸버그NEF에 따르면 전 세계 전력망 투자액은 2020년 3000억달러에서 2027년 5770억달러(약 837조원)로 두 배 가까이 늘어날 전망이다.
기후정책연구소와 국제재생에너지기구(IRENA)는 2024년 세계 전력망 투자가 3590억달러에 달했다고 발표한 바 있다. 앞으로 얼마나 빠른 속도로 전력망 투자가 늘어날지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다. 태양광 풍력 등 변동성 전원이 늘고, 데이터센터·산업 전력화로 수요가 급증하면서 기존 전력망의 한계가 드러난 결과다.
◆ 미·중· 유럽, 계통병목 해소에 수백조 이상 투자 = 전력망 투자에서 미국과 중국은 압도적이다.
블룸버그NEF에 따르면 미국의 전력망 투자는 2020년 720억달러에서 2027년 1280억달러로 늘어날 전망이다. 중국도 같은기간 710억달러에서 1240억달러로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 두 나라의 전력망 투자액이 전 세계 투자규모의 약 절반을 차지한다.
유럽의 전력망 투자도 2023년 이후 가속화되고 있다. 독일은 재생에너지 확대와 국경간 전력망 통합을 추진하며 2020년 110억달러에서 2027년 350억달러로 투자규모가 세 배 이상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영국도 비슷한 흐름을 보이고 있다.
아시아·태평양(중국 제외) 지역에서는 2020년 530억달러에서 2027년 830억달러로 증가할 전망이다. 에너지전환이 글로벌 경쟁으로 확산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인허가 지연·전문인력 부족·비용이 발목 = 문제는 투자 증가가 곧바로 병목 해소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블룸버그NEF는 2025년 전 세계 전력망 투자액이 사상 처음으로 4700억 달러를 넘어섰을 것으로 추정했지만 신규 발전과 수요 연결 지연은 계속될 가능성이 높다고 내다봤다.
인플레이션과 장비 비용 상승으로 인프라 확장에 물리적인 제약이 생겼고, 인허가 지연과 전문인력 부족도 발목을 잡고 있다. 태양광·풍력 등 발전소를 다 지어놓고도 국가 전력망에 연결을 하지 못해 대기하고 있는 발전설비 연결 대기열이 과도하게 많다.
특히 대규모 데이터센터와 전력 다소비 산업의 연결 요청이 송전망에 집중되면서 부담이 가중되고 있다.
미국 전력연구소(EPRI)에 따르면 구글에서 한 번 검색할 때 사용되는 전력은 0.3Wh(와트시)지만 챗GPT의 경우 2.9Wh가 소요된다. 나아가 구글 등 빅테크에서 기존 검색 포털에 AI 검색 서비스를 추가하면서 검색 포털의 전력 소모량도 현재보다 약 30배 늘어날 수 있다는 전망까지 나오고 있다.
◆ 송전망 투자가 배전망 투자 추월 = 투자 구조에서도 변화가 감지된다.
2024~2027년 송전망 투자의 연평균 성장률은 16%로, 배전망(9%)의 거의 두 배에 달할 전망이다. 현재는 배전망 투자 비중이 크지만 이러한 추세가 이어지면 2020년대말 이전에 투자 중심이 송전망으로 이동할 가능성이 크다.
장거리 연결, 신규 변전소, 고전압 직류(HVDC) 프로젝트가 송전망 투자 확대를 이끌고 있다. 재생에너지 발전지와 수요지를 연결하고, 대규모 산업 수요를 안정적으로 감당하기 위한 필수조건으로 부상했다.
블룸버그NEF는 “전력망 확장은 성공적인 글로벌 에너지 전환의 핵심이지만 투자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구조적 장벽이 존재한다”고 분석했다. 에너지전환의 승부처는 이제 발전설비가 아니라 전력을 연결하고 조율하는 전력망이라는 점이 분명해지고 있는 것이다.
◆ 한국 전력당국, 책임있는 리더십 필요 = 한국의 전력체계 취약점도 더 이상 발전설비 확충이 아니라는 지적이다. 현재 부분적으로 조짐이 나타나고 있지만 향후에는 전력을 만들어 놓고도 보내지 못하는 ‘전력망 병목현상’이 큰 문제가 될 것으로 우려된다.
한국은 대규모 발전소를 비수도권에 짓고, 수도권으로 전력을 끌어오는 중앙집중형 구조다. 재생에너지는 지역편중이 심하고, 반도체·데이터센터 등 전력 다소비산업은 수도권에 집중돼 있다. 이러한 수요와 공급의 불일치 현상이 송전망 병목현상으로 이어져왔다.
이와 관련, 김성환 기후에너지환경부 장관은 최근 수도권 전력 과부하를 이유로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의 지역이전 필요성을 거론하며 산업계·에너지업계에 논란을 불지피운바 있다.
전력 생산지와 소비지를 일치시키는 ‘지산지소’(地産地消) 정책방향은 타당성이 있다. 다만 이미 천문학적 자본이 투자됐거나 투입예정인 국가전력사업을 흔든 것은 기업의 생존을 위협할 뿐 아니라 정부정책의 불신을 가중시켰다.
다수의 전문가들과 업계에서는 “지금 필요한 건 정부의 일관된 정책과 실행력”이라며 “약속된 투자가 차질없이 이행되도록 전력과 용수를 적기에 공급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산업통상부 전직 고위관계자는 “재생에너지를 얼마나 늘리고, 신규 원전을 짓느냐 마느냐의 문제는 한국 전력산업 구조의 해답이 아니다”라며 “어떤 전원이든 전력을 필요한 곳에 제때, 안정적으로 보내지 못하면 무용지물”이라고 말했다.
이어 “정부는 여론을 떠보거나 공론화 명분 뒤에 숨지 말고 ‘책임 있는 리더십’을 보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안정적인 전력공급 및 전력계통의 유연성 확보, 송전망 중심의 투자전환, 일관된 정책에 따른 신뢰 회복 등이 핵심과제라는 지적이다.
이재호 기자 jhlee@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