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피해자 가족, 위자료 청구 가능”
대법원 전합 “청구권 행사할 수 없었던 장애사유 존재” 파기 환송
소멸시효 기준으로 ‘권리행사의 객관적·합리적 기대 가능성’ 제시
5.18민주화운동 피해자 가족들이 과거 보상금을 받았더라도 국가에 별도로 정신적 손해에 대한 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재판장 조희대 대법원장·주심 노태악 대법관)는 22일 5.18민주화운동 유족 유 모씨 등 33명이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을 내린 원심을 파기하고 사건을 광주고등법원으로 돌려보냈다.
대법원은 “원고들은 이 사건 위헌결정일인 2021년 5월 27일까지 관련자의 가족으로서 가지는 고유의 위자료 청구권을 행사할 수 없었다”며 “관련자 가족 고유의 위자료 청구권을 행사할 수 없었던 장애사유가 존재했다”고 판시했다.
이번 사건은 1990년대 제정된 광주민주화보상법에 따라, 5.18 관련자 본인이나 유족이 보상금을 받은 경우 그 사건에 대해 더 이상 국가에 책임을 묻지 않기로 한 것으로 본다는 규정에서 비롯됐다. 이 때문에 오랫동안 5.18 피해자 가족들은 국가를 상대로 위자료를 청구할 수 없다고 여겨져 왔다.
그러나 헌법재판소는 2021년 5월 27일 해당 법조문의 ‘광주민주화운동 관련 피해’ 중 ‘정신적 손해’에 대한 국가배상청구권 행사를 금지하는 것은 위헌이라고 판단했다. 국가가 정신적 손해배상에 대한 보상도 해야 한다는 취지다.
이에 5.18민주화운동 유족들(원고)은 헌재 판결 6개월 뒤인 2021년 11월 25일 국가(피고)를 상대로 정신적 손해에 대한 국가 배상 소송을 청구했다.
피고는 소멸시효 완성 및 이미 관련법에 따라 위자료 성격의 위로금이 지급됐기에 정신적 손해에 대한 배상까지 이뤄졌다고 주장했다.
1심은 유족들의 손을 들어줬다. 1심 재판부는 “위로금은 사회보장적 성격의 금원일 뿐 정신적 손해배상금인 위자료와 구분된다”며 “정신적 손해에 대한 배상이 이뤄졌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또 원고 28명에 대해서는 국가의 위자료 배상 청구권이 아직 살아있다고 판단했다. 헌재 결정이 있었던 2021년 5월 27일까지는 위자료 청구권을 행사할 수 없었던 ‘법률상 장애사유’가 존재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항소심 재판부는 “3년의 단기소멸시효는 늦어도 관련자들이 보상심의위원회로부터 보상금 등의 지급결정을 받은 날부터 진행된다고 봄이 타당하다”며 “원고들의 고유 위자료 채권은 이미 시효로 소멸했다”고 판시했다.
하지만 대법원 전원합의체의 판단은 달랐다. 대법원은 소멸시효는 단순히 시간이 흘렀다고 자동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가 실제로 권리를 행사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객관적·합리적으로 기대할 수 있었을 때부터 진행된다고 밝혔다. 이 사건의 경우 보상금 수령 과정과 당시 법 해석 관행상, 가족들로서는 위자료 소송이 가능하다고 기대하기 어려웠다고 봤다.
대법원은 “국가배상제도의 목적과 과거사 사건의 특수성 및 그 피해자 보호 필요성을 아울러 고려한다면, 관련자의 가족에게 보상금 등 지급결정일에 자기 고유의 위자료 청구권을 행사할 것을 객관적, 합리적으로 기대할 수 있었다고 평가할 수는 없으므로, 보상금 등 지급결정일을 소멸시효 기산점으로 삼을 수 없다”고 판시했다.
이번 판결에서 다수의견은 손해배상 청구권의 소멸시효 기산점을 판단할 때 ‘권리행사의 객관적·합리적 기대 가능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기준을 처음으로 명확히 제시했다. 단순히 법률상 장애가 있었는지 여부에 그치지 않고, 과거사 사건의 특수성과 국가가 보상 제도를 운영하는 과정에서 권리행사를 사실상 어렵게 만든 사정까지 함께 고려해야 한다는 취지다.
김선일 기자 sikim@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