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병목은 GPU 아닌 메모리였다
샌디스크 1년새 1100% 급등 … 다보스서 젠슨 황 언급 후 관련주 급등 이어져
AI 인프라 투자 규모가 올해 5000억달러를 넘길 것이란 전망 속에, 고성능 메모리와 데이터 저장장치 업체 주가는 최근 몇 달 사이 가파르게 뛰었다. 초대형 기술주 랠리가 주춤한 것과 대비된다. 샌디스크 주가는 1월 초 이후 거의 2배가 됐고, 지난해 8월 이후로는 약 1100% 상승했다. 같은 기간 마이크론과 웨스턴디지털은 3배로 뛰었고, SK하이닉스도 비슷한 폭으로 올랐다.
스위스 피크테자산운용의 멀티에셋 전략가 아룬 사이는 “최근 몇 달의 급등은 보기 드문 강도”라며 “AI 랠리의 내러티브가 메모리로 옮겨갔고, 지속되는 AI 설비투자 확대에서 메모리가 병목 지점이 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업종 랠리는 이달 초 엔비디아 CEO 젠슨 황이 “AI 시대에는 연산 능력만큼이나 메모리와 저장장치가 병목이 될 수 있다”고 언급하면서 가속화됐다. 시장의 시선이 GPU에서 메모리·저장장치로 옮겨간 것이다.
마이크론, SK하이닉스, 삼성전자는 챗GPT 같은 대형언어모델을 구동하는 엔비디아 프로세서에 데이터를 빠르게 공급하는 HBM(고대역폭 메모리)의 핵심 제조사다. AI 모델이 고도화될수록 데이터량이 폭증하면서, 샌디스크 같은 업체의 낸드플래시 기반 저장장치 판매도 늘고 있다. 이런 메모리는 가격이 비싸 AI의 데이터 수요가 웨스턴디지털, 씨게이트의 하드디스크드라이브(HDD) 같은 전통 저장장치 수요로도 이어지고 있다.
ARM 최고경영자 르네 하스는 이번 주 다보스에서 파이낸셜타임스와 만나 “AI에서 쓰이는 HBM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었다”며 “수요는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라고 말했다.
하지만 메모리 시장은 몇 년마다 공급 부족과 공급 과잉이 교차하는 극심한 경기 변동이 반복돼 왔다. 이 때문에 제조사들이 생산능력 확대에 신중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재너스 헨더슨의 기술주 포트폴리오 매니저 리처드 클로드는 “공급이 조여든 상황에서 수요가 커지면, 다른 원자재처럼 가격이 걷잡을 수 없이 치솟는 국면이 온다”고 했다. 기술 컨설팅업체 크리에이티브 스트래티지스의 벤 바자리인은 이런 공급난이 최소 2028년까지 이어질 것으로 내다봤다.
투자자들이 메모리·저장장치로 눈을 돌린 것은 그간 S&P500 상승을 견인해온 초대형 기술주들이 지난해 11월 중순부터 고평가 논란과 과도한 지출 우려로 힘을 잃었기 때문이라고 FT는 분석했다. 엔비디아 주가는 작년 기록적인 상승으로 시가총액 5조달러를 돌파했지만, 현재는 10월 고점 대비 11% 낮은 수준이다. 피크테자산운용의 아룬 사이 전략가는 “AI 투자 전략이 노출 종목을 한 바구니로 담아두는 방식에서, 승자와 패자를 가려내는 방식으로 바뀌고 있다”고 말했다.
한편 헤지펀드가 당국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월가의 대형 헤지펀드인 D.E. 쇼는 작년 3분기 샌디스크, 마이크론, 씨게이트, 웨스턴디지털 보유량을 늘렸다. 9월 말 이후 보유를 유지했다면 약 39억달러(약 5조7230억원)의 수익을 올렸을 것으로 추산된다. 애로우스트리트는 같은 기간 샌디스크와 씨게이트 비중을 확대해 약 13억달러의 이익을 냈을 것으로 보이며, 르네상스 테크놀로지스는 샌디스크와 웨스턴디지털 투자 비중을 각각 2배, 5배 늘려 약 4억3500만달러의 수익을 올린 것으로 추정된다.
이주영 기자 123@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