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랑 속 키 잡은 필리핀, 2026 아세안의 시험대
남중국해·미얀마 문제·AI 전환까지 … 의장국 필리핀에 쏠린 지역의 시선
아세안 외교장관들은 올해 의장국 활동의 방향 설정과 우선순위 논의를 위해 지난달 28~29일 필리핀 세부에 모였다. 의장국 활동의 첫 중요 출발점이 될 아세안 외교장관 리트릿(retreat)이 필리핀 외교장관 주재 하에 개최돼 의장국 우선순위 논의에 시동을 걸었다. 동시에 금년 전체에 걸쳐 시행될 아세안의 주요 과제 이행 계획을 보여주는 기회이기도 했다. 2026년은 아세안 2045 비전 이행의 시작을 알릴 것이다. ‘아세안 2045-우리의 미래 공유’는 아세안의 20년 비전문서와 아세안 공동체 4개 기둥 별 과제와 전략 계획을 포함한다.
마르코스 필리핀 대통령은 작년 12월 1일 아세안 2026 의장국 수임 국가 출범식에서 필리핀의 의장국 수임의 의의를 이렇게 정리했다:
"올해 의장국 주제는 우리의 비전과 신념을 담고 있다. 아세안의 강점은 단합에 있다. 아세안은 평화적이고 번영하며 사람 중심적인 미래를 제시할 수 있다. 그 주제는 미래지향적인 아세안을 상상한다. 혁신을 포용하고 다양성을 활용하며 사람들을 우리가 오늘내일 직면하는 도전에 대비시킨다. 필리핀은 우리 지역의 세가지 중심적 우선순위-평화·안보의 닻, 번영의 회랑 및 사람의 역량 강화-에 근거해 아세안 호를 이끌고 나갈 것이다. 이러한 우선순위는 지역안보에 대한 대화와 협력을 강화하고 혁신과 지속가능성을 통한 경제통합을 심화하고 사람들의 생활과 회복력에 희망을 심는 아세안의 노력을 인도할 것이다. 평화와 안보 분야에서 의장국은 신흥기술 특히 AI의 책임감 있고 윤리적 사용을 부각시킬 것이다. 우리는 조기경보체제, 해양영역인식, 인도적 지원 및 재난 대응을 위해 AI를 활용할 것이다. 경제 분야에서는 아세안을 디지털 역량 강화 공동체로 전환시키는데 주력하면서 안전하고 윤리적이며 공평하고 지속 가능한 AI 채택을 추구할 것이다."
필리핀이 피할 수 없는 두개의 난제
작년 아세안 의장국 말레이시아의 의장직 수행은 비교적 호평을 받고 있다. 정치적으로 민감하고 지정학적 요소가 얽힌 남중국해 문제와 미얀마 위기를 제외하고는 선방했다는 평가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다수의 전문가들은 필리핀이 말레이시아의 성과를 기반으로 삼아 차분하게 실적을 쌓아 올리는 접근법을 구사할 필요성을 제기한다.
필리핀은 이 두 가지 난제의 매듭을 풀기위해서 바짝 서두르는 모습이다. 우선 미얀마 사태 해법 모색 관련, 마르코스 대통령은 작년 12월 1일 마리아 테레사 라자로 외교장관을 의장국의 미얀마 특사로 임명했고, 라자로 특사는 올 1월 초 미얀마를 방문해 민 아웅 흘라잉 군사정부 최고 지도자를 면담했다.
라자로 특사는 또 1월 하순 필리핀 타가이타이에서 미얀마 이해 관계자 회의를 주재하고, 분쟁의 단계적 축소와 정치적 대화 분위기 조성 등을 논의했다.
아세안 외교장관 리트릿 결과
앞서 언급한 아세안 외교장관 리트리트에서도 최근 미얀마 선거와 남중국해 문제가 비중있게 다뤄졌다. 미얀마 군부가 주도한 선거 결과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반복하고 미얀마에서 자유롭고 공정하며 평화적이고 투명하며 포용적이고 신뢰할 수 있는 총선을 지지하는 입장을 재확인하며 미얀마 군부에 정통성을 부여하지 않도록 경고장을 날렸다.
남중국해 문제 관련, 라자로 외교장관은 당사국 행동강령(CoC) 협상을 완료하고 관련 절차를 마무리 하려고 하며 동시에 CoC 협상은 의미 있고 국제법에 기반을 둬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필리핀은 올해 목표 시한을 맞추기 위해 아세안 회원국들과 중국 간의 CoC 기술실무 회의를 월례 대면회의로 개최할 의지를 피력했다.
아세안과 중국은 지난 2002년 남중국해 당사국 행동선언(DoC)에 서명했다. DoC는 평화적 분쟁 해결 원칙을 확립했다. 비록 DoC는 구속력은 없지만 아세안은 법적으로 구속력 있는 CoC를 추구해 왔다.
반면, 중국은 협상을 의도적으로 지연시켜 왔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이러한 협상 구도는 필리핀이 제기한 남중국해 소송에 대해 2016년 헤이그 상설중재재판소의 판결에 의해 바뀌었다. 재판소가 중국의 구단선(nine-dash-line)은 국제법적 근거가 없다고 판결해 변곡점을 맞았다.
패소 이후 베이징은 CoC 협상에 보다 전향적인 태도를 보이는 듯했지만 이는 중재 판결의 파급력을 희석하려는 전략이라는 해석이 널리 제기됐다.
행동강령은 왜 아직도 타결되지 못했나
그렇다면 왜 CoC 협상이 여전히 종결되지 못했는가? 아세안 외교 소식통에 의하면 중국은 법적 구속력 있는 문안을 받아들이기 꺼려왔으며 반면 아세안은 역외 국가와 연합 근사훈련과 공동 자원개발을 제한하려는 중국의 요구에 강력하게 저항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아세안은 필리핀 외교정책의 기둥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아세안의 내재적 한계 역시 인정되어야 한다. 아세안 조직은 정치·안보 도전을 우선적으로 다루기 위해 설계되지 않았다.
아세안의 핵심 사명은 경제 협력 중심이며 여기에 어느 정도 사회문화 관여에 중심이 맞추어져 있다. 필리핀이 장기간 지연된 CoC 협상을 진전시키겠다는 의지를 천명했지만 필리핀 정부가 어떤 협정도 특히 유엔해양법협약 등 관련 국제법과 2016년 중재재판소 판결에 의해 확인된 필리핀의 권리를 손상하지 않도록 신중을 기할 것으로 보인다.
이와 더불어 라자로 장관은 올해 의장국의 우선적 경제 산출물(deliverables)은 무역투자 연계 강화와 디지털 전환 가속화, 아세안 중소기업 개발 의제 통합, 창조경제 활용, 아세안 경제공동체 전략계획 2026-2030에 따른 지속 가능하고 포용적 성장 촉진 등에 초점을 맞출 것이라고 밝혔다.
구체적으로 아세안·캐나다 FTA, 한·아세안 FTA 업그레이드 및 세계 최초의 지역 디지털 협정인 아세안디지털경제프레임워크협정(DEFA)을 포함한다. EU와 FTA 역시 적극적으로 추진해야 하며, 추가적으로 필리핀은 아세안 중소기업과 창조산업 ‘우수센터’를 설립하고 아세안싱글윈도우(ASW)2.0 실행을 추진한다.
작년 말레이시아의 의장국 수임은 앞으로 지속되거나 반복되어야 할 몇가지 이정표를 산출했다. 첫째, 아세안-중국-GCC 정상회의, RCEP 정상회의 개최, ‘지경학에 대한 아세안 TF’ 설립을 이뤘다. 또한 아세안-중국 FTA3.0 업그레이드, 아세안 상품무역협정 업그레이드를 성사시켰으며 BRICS 지도자들을 아세안 정상회의에 초대했다. 의장국이 누구냐에 관계없이 이어가야 할 중요한 사업들이다.
다보스 포럼과 아세안
이번 다보스 포럼에서도 아세안 패널이 조직됐다. 눈여겨 볼만한 사항이 여럿 있다. ‘아세안은 충분히 빠르게 움직이느냐’가 패널의 주제였다. 싱가포르 일간지 스트레이트타임스의 제이미 호 편집인이 진행을 맡았다. 요지는 이렇다:
"변화하는 국제질서가 아세안을 수십 년 만에 가장 어려운 시험대에 올려놓고 있다. 그러나 패널 연사들은 지금 몰아치고 있는 격변이 기회를 창출하고 있으며 아세안 지역이 이를 포착하기에 아주 적합한 위치에 있다고 말한다. 동남아가 그 자신이 원하는 것보다 느리게 움직이고 그 자신이 도전을 인정하고 있지만 스스로에게 너무 가혹하게 굴고 있지는 않는지? 동남아의 다양성, 중립성, 점증하는 회복력을 활용해야 한다. 지정학, AI에 의한 변화 및 기후변화 등 세 가지 대규모 전환이 포럼의 논의를 압도하였다. 대규모 변화가 일어나고 구식 전략이 취약해지는 세계에서 아세안은 다 함께 더 긴밀하게 협력할 필요가 있다. AI는 매우 중요한 생산성 증가를 가져오지만 주의 깊게 관리하지 않으면 사회적 위험을 동반한다는 경고도 나왔다. 젊은 층에게 좋은 일자리를 제공하지 못하면 이는 대규모 사회 불안을 야기할 수 있다. 아세안은 혼란을 기회로 바꾸기 위해 교육, 기술, 지역 연계성에 더 투자할 필요가 있다."
회복력 입증, 이제는 성장의 길
아세안 경제는 지정학적 불확실성과 높은 관세에도 불구하고 작년에 다수의 투자자들이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회복력이 빠름을 입증했다. 초점은 얼마나 빨리 이 지역이 성장하느냐 하는 것일 뿐 아니라 성장의 질에도 맞추어야 한다.
아세안은 아이디어, 문화, 콘텐츠 면에서 매우 경쟁력이 있으며 이는 창조경제로 이어진다. 특히 혁신 분야에서 동남아는 생각하는 것보다 잘 하고 있다. 동남아는 혁신의 선두에 서 있다. 동남아는 이제 40~50개의 유니콘 기업을 보유하고 있다. 이는 신흥 경제지역으로서는 가장 높은 수치임을 보여준다.
핵심 과제는 단순히 기술 도입률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기술이 사회 전반에 얼마나 빠르게 확산될 수 있는 지 하는 문제이다. 아세안에 AI와 디지털화 바람이 세차게 불고 있다. 한·아세안 협력의 창이 열리고 있다. 이 기회를 현명하게 포착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