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선결과가 태국의 미래를 바꿀 수 있을까?
애국주의 바람 속 보수진영 압승 … 경제 구조개혁은 또다시 시험대에
기대를 모았던 인민당(People’s Party)은 방콕시 지역구 33개 전체, 수도권인 논타부리주 8석 전석, 그리고 사뭇 쁘라칸 8석 중 7석 등 수도권을 휩쓸었으나 다른 지역에서 의석을 상당히 잃어 118석으로 지난 총선에서 전신인 전진당이 얻은 151석보다 대폭 의석이 감소했다. 전진당의 왕실모독죄 폐지 공약을 포기하고 좀 더 제도권 정당의 색채를 가미하려 했으나 큰 효과는 없었다. 다행히 비례대표에서는 품짜이타이당보다 400만표 가까이 더 얻음으로써 개혁에 대한 국민들의 의지는 확인할 수 있었다.
2001년 이후 태국에서 또 다른 왕가처럼 아버지(탁신)- 여동생(잉락)- 딸(패통탄)이 정권을 담당했던 프어 타이당은 이번에 대학교수인 탁신의 조카를 얼굴로 내세웠으나 북부와 동북부 지역의 지지세를 유지하지 못하고 74석을 얻는데 그쳤다. 치앙마이 8석 전석 등 북부와 캄보디아와 국경지역인 동북부 일대에서 의석을 대폭 잃어 지난 총선의 141석에 비해 의석이 거의 절반으로 줄었다.
품짜이타이당의 약진은 캄보디아와 국경분쟁으로 인한 국가주의가 팽배한데 이유가 있다. 선거전에서 폼짜이타이당은 외부 갈등을 이용해 애국주의를 부추겨 지지층을 결집했다. 제 4당이 된 끌라탐당도 친군부 정당으로 현재의 소수연립정권에 참여하고 있는 덕을 보았다.
공식적인 선거결과는 15일에 발표될 것이고 새 총리 선출은 4월 15일까지인데, 품짜이타이당과 끌라탐당만으로도 과반을 확보함으로써 보수정권을 꾸릴 수 있게 됐다. 여기에 프어 타이당을 끌어들인다면 오랫만에 안정적인 정부를 수립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동남아의 지진아로 전락한 태국
총선 결과는 성장 동력이 떨어진 태국경제를 되살릴 수 있을까? 태국은 풍부한 농업 기반 위에 수출제조업을 기반으로 성장했다. 일본의 전자 및 자동차 업체가 태국을 주요 공업국으로 육성한 가운데, 내수부문은 정부 인허가를 통해 형성된 독과점적 구조가 정착됐다. 지금 세계 제조업이 반도체, AI 등 첨단산업으로 전환하고 있지만 태국 가전산업은 경쟁력을 잃었고 자동차산업 또한 일본 기업에 장악됐다. 더구나 1990년대 말 외환위기 이후 2001년부터 탁신과 그의 일가가 정권을 담당했으나 2006년과 2014년에 쿠데타가 있었다. 2015년부터 2024년까지 10년 동안 태국의 연평균 성장률은 2.0%이었으나 말레이시아는 4.0%였고, 베트남은 6.2%였다. 올해에도 태국의 성장률은 1.6%에 그칠 전망이다.
태국의 성장률이 경쟁국에 비해 낮은 이유는 총수요 부족 때문이다. 태국의 가계부채는 2025년 2/4분기 현재 GDP의 86.8%로 매우 높은 수준이고, 50% 이상의 하위 소득 가계는 부채의 함정에 빠져 있다. 정정불안과 수요증가 둔화로 다국적기업은 베트남, 인도네시아로 간다. 반도체 분야에서 다국적기업들은 태국보다 말레이시아를 선호한다. 픽업트럭이 주요한 수출품이지만 일본업체에 자본과 기술에 의존하면서 부가가치가 높은 수출부문으로 이전이 어렵다. 태국의 수출이 베트남에 밀린 지 오래 되었다.
태국 경제의 부진은 쿠데타 이후의 정치 불안에도 연유하지만 근본 원인은 정치경제에 도사린 구조적 불균형으로 역동성이 저하된데 있다. 세계은행에 따르면 2021년 상위 10%의 인구가 전체 국부의 70% 이상을 차지하고 하위 50%는 약 1%만을 소유하고 있다. 부의 편중도는 현재 더욱 높아졌을 것이다.
태국은 또한 방콕과 그 주변 지역에 경제 성장과 자원이 집중돼 있다. 지역구 의석이 133석인 동북부 지역(이싼 지역이라고 부름)의 1인당 소득은 방콕의 1/6에 불과하다. 이와 같은 소득격차는 자산 소유의 불평등을 심화할 뿐만 아니라 저소득지역에서 공공 인프라 투자, 교육기회의 부족 문제를 낳는다.
한 국가경제의 성장과정은 동식물의 성장곡선과 유사하다. 저소득 단계에서는 빠르게 성장하지만 성숙 단계에 들어서면 성장 속도는 급격히 감소하고 정체한다. 문제는 태국이 1인당 소득 7000달러 정도인데도 성장률이 극히 낮다는 것이다.
국가의 정체 이론에서 태국 사회를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논리는 맨셔 올슨(Mancur Olson)과 대런 아스모글루(Daron Acemoglu)의 주장이다. 올슨은 ‘국가의 흥망성쇠’에서 “공익보다는 편협한 소수의 이익을 추구하는 집단들의 결집”, 즉 분배동맹이 국가의 쇠퇴를 가져온다고 주장하고 있다. 즉 자신들의 혜택을 얻기 위해 소규모의 특화된 이익 집단(연합)들이 사회 전체를 희생시키면서 형성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연합은 지대 추구를 조장하고 변화에 저항함으로써 경제 성장을 저해한다. 한편 재작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아스모글루는 ‘왜 국가는 실패하는가?’에서 소수자가 다수 국민을 희생시키면서 이익을 얻는 약탈적 제도 때문에 국가가 실패한다고 보았다.
태국은 이들이 말하는 사례에 가장 가까운 국가이다. 왕실, 군부, 관료, 화교기업가 등 기득권층이 국민 대다수의 이익과는 다른 의사결정을 하고 있다. 최저임금 수준이 가장 단적인 예다. 2018~2024년 기간 태국의 1인당 소득은 13% 증가했지만 최저임금은 11.7% 상승에 그쳤다. 이는 말레이시아가 소득 23.5% 증가에 최저임금이 50% 상승한 것과 대조된다.
최저임금 대상자의 소득원이 자본소득 보다는 임금 소득이 대부분이라는 점에서 태국에서 부의 양극화는 더 심화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불평등 축소, 왕실 및 사법 등 권력구조 개편, 군부의 정치 참여 배제, 독점적 관행 타파, 교육 평등 등의 문제가 다뤄져야 한다.
태국 정치인들도 구조적 문제를 이해하고 있다. 인민당은 과거에 머물 것인가 미래를 선택할 것인가를 구호로 구정치와 단절을 내걸었다. 과거 총리를 지낸 민주당 아비싯 대표는 “소수의 부패한 사람들이 우리 모두의 미래를 망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취약계층과 저소득층을 위한 사회 안전망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품짜이타이당도 부의 집중과 빈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새로운 역량 구축을 목표로 정책을 제시했다.
그러나 이번 총선 결과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태국 정치제도는 민의를 왜곡하기 쉽다. 수도권을 석권하고 비례대표득표율이 50여개 정당 중 31% 이상인 인민당의 앞날이 밝지만은 않다. 인민당이 개혁의 후퇴라는 비판을 받으면서도 이번 선거에서 형법 112조, 왕실모독죄 개정을 요구하지 않았음에도 선거가 끝나자마자 9일 국가반부패위원회는 과거 전진당 의원 44명이 왕실모독죄 개정에 서명함으로써 윤리를 위반했다고 결정해 헌법재판소에 넘기기로 했다. 이 중에는 이번 인민당 당선자가 10명이 포함되어 있다. 이들은 의석을 잃을 수도 있다.
기득권 분배동맹 더 강화될 듯
또한 선거결과로 기득권 세력의 연합이 공고해질 수 있다. 선거는 캄보디아와의 무력충돌로 인한 국가주의가 지배했다. 품짜이타이당의 아누틴 총리는 과거 보건부 장관 시기에 대마초 농가를 지원한다는 명목으로 이를 합법화시킨바 있다. 중장기적 경제정책이나 사회정책이 아닌 대증적 요법이었다. 이번에 그는 군부와 우호적인 관계 속에 애국주의를 강조하면서 대승을 거두었다.
보수 정부는 군부에게 더 많은 권한을 보장해야 한다. 전쟁없는 상태에서도 수십년 태국정치를 지배해온 군부가 이 기회를 놓치려하지 않을 것이다. 태국 경제의 장기 침체의 원인인 왕실- 군부- 보수 기득권의 분배동맹이 더욱 강화될 가능성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