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금세탁방지 의무’ 국제기준에 뒤처져…국제평가 앞둔 FIU ‘대응 속도’
법인뿐 아니라 신탁 등에 대한 실소유자 확인 시스템 미비
최근 평가 받은 싱가포르, 신탁 등 실소유자 파악 체계 ‘미흡’
변호사·회계사·세무사 등 비금융사업자 ‘자금세탁방지 의무’도
국내 자금세탁방지 체계가 국제자금세탁방지기구(FATF)에서 제시한 기준에 못 미치고 있는 상황에서 평가를 앞둔 금융당국의 대응 속도가 빨라지고 있다. FATF는 법인 및 신탁의 실소유자 확인 시스템을 요구하고 있지만 국내 금융당국은 법적 권한을 비롯해 관련 체계를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최근 평가를 받은 싱가포르는 법인의 실소유자 확인에 대해서는 기준을 통과했지만, 신탁 계약을 통한 자산 보유 구조의 경우 실소유자 확인이 충분하지 않다는 점이 지적된 것으로 알려졌다.
19일 금융당국에 따르면 금융정보분석원(FIU)은 이달 9일부터 13일까지 멕시코에서 열린 FATF 총회에 참석했고, 이형주 FIU 원장은 총회 기간 중에 싱가포르 금융당국 대표 호헌신과 만나 평가 수검 과정을 상세히 공유받았다.
FATF 상호평가 결과가 중요한 이유는 국제사회에 미치는 영향력 때문이다. FATF는 회원국들에게 부정적 평가를 받은 국가의 국민 및 금융회사와 거래시 특별한 주의를 요구하는 등의 조치를 취하도록 규정화했다. 이같은 영향력은 점차 커지고 있다.
실제로 ‘강화된 관찰대상’에 포함된 국가에 대해 세계 3대 신용평가사인 피치가 경제성장률을 0.3%p 하향 조정했고, 자국통화의 가치 하락에 따른 지속적 환율상승을 예상했다.
해당 국가는 이후 범국가적인 제도 개선 및 개선 의지를 밝히는 등 적극적인 노력을 수행한 결과 강화된 관찰대상에서 제외된 사례가 있다.
싱가포르는 이미 법인 및 신탁의 실소유자 확인 시스템을 갖추고 있지만, 신탁을 비롯한 신탁 유사 구조까지 확대된 범위의 실소유자 확인에는 미흡하다는 지적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국내에서 법인에 대한 실소유자 정보를 가장 많이 확보하고 있는 기관은 국세청이다. 하지만 국세청은 과세 관련 목적에만 관련 정보를 제한적으로 사용해야 한다는 입장이어서 다른 기관과 정보를 공유하지 않고 있다. 금융당국은 국세청 자료의 공유를 실소유자 확인에 한정해서 받을 수 있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으며, 금융회사들의 고객 확인 정보를 활용해 최대한 신속하게 법인과 신탁의 실소유자 확인 시스템을 별도로 구축하겠다는 계획이다.
이억원 금융위원장은 지난 5일 국회 정무위원회에 출석해 특금법(특정 금융거래정보의 보고 및 이용 등에 관한 법률) 개정을 통해 법인 실소유자 파악 시스템을 최대한 신속하게 구축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FIU는 “싱가포르 등 제5차 라운드 상호평가를 수검한 국가들의 평가 결과를 참고해 향후 한국의 평가에 대비해야 할 것”이라며 “특히, 상호평가 수검이 약 2년 앞으로 다가온 만큼 범부처 합동 평가 대응단을 구성해 제4차 상호평가에서 기준 이행이 미흡했던 부분을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상호평가는 2028년 3월로 예정돼 있다.
FATF는 4차 라운드 상호평가부터 평가 대상을 확대하고 절차를 상설화했다. 법제도 정비 여부(기술적 이행) 평가 외에 제도의 실질적 작동 여부(효과성) 평가를 추가했다.
금융당국 관계자는 “한국은 법인 실소유자 확인 시스템 등 아직 법제도에서 미흡한 점이 있고, 효과성 평가에서 미이행 지적이 많았다”며 “준비할게 많아서 남은 시간이 2년이라고 해도 충분하지 않을 수 있다”고 말했다.
4차 평가 결과를 보면 평가항목 40개 중 32개 항목에서 이행등급을 받았다. 하지만 법제도의 실제 이행 여부를 평가하는 11개 항목 중에서는 5개 항목만 이행등급을 받았다. 특히 특정비금융사업자, 테러자금 동결, 고위공직자, 법인의 실소유자 관리 등 8개 항목은 법제도 미흡으로 부분이행 평가를 받았으며, 금융회사·특정비금융사업자의 의무 이행과 감독, 자금세탁 범죄 수사·기소 등 6개 항목은 법제도 미흡으로 인해 보통이행으로 평가됐다.
상호평가를 받은 국가들은 3단계로 분류되는데, 2019년 평가를 받은 한국은 가장 높은 1단계(정규 후속점검)에 포함되지 못했고 2단계(강화된 후속점검)에 머물러 있다.
특정비금융사업자에 대한 자금세탁방지의무화 추진도 중요한 과제다. FATF 국제기준에서 특정비금융사업자의 범위는 변호사, 회계사, 세무사, 공증인, 부동산중개인, 귀금속상 등이다. 금융당국은 올해 들어 대한변호사협회, 한국공인회계사회, 한국세무사회 등이 참여한 정책협의회를 열고 논의에 착수했다.
FATF는 이들에 대해 △고객 및 고객의 실소유자의 신원을 확인·검증 △자금세탁 의심행위에 대해 보고의무 △의무 이행 여부를 지정된 감독기관이 감독하는 등의 의무를 부과하도록 했다. FATF 정회원국 37개국 중 20개국 이상이 이 같은 국제기준을 이행하고 있다.
금융당국 관계자는 “국제기준에 맞게 특정비금융사업자에 대한 자금세탁방지 의무를 추진하고 있지만, 이들의 수용성을 고려해서 단계적으로 접근 중”이라고 말했다. 특정비금융사업자의 자금세탁방지 의무와 관련된 특금법 개정안이 2017년 발의됐지만 변호사 업계의 강한 반발로 무산된 바 있다.
이경기 기자 cellin@naeil.com